민원 핑퐁·전화 뺑뺑이… 장관보다 무서운 현장공무원

김지섭 기자 신수지 기자
입력 2020.01.14 03:20

[공무원 공화국] [中] 민원인 열받게 하는 공무원 백태
A구청 - 국토부는 세대구분 공사 허용했는데 담당 8급 "명확한 지침없어 안된다"
B구청·주민센터·경찰 - 이웃집 쓰레기 치워달라 민원 넣었는데 서로 "우리 일 아니다" 미루며 나몰라라
C구청 - 돌고 돌아 담당자 연락 닿았는데 '출장'… 팀장이 5일 후 연락 준다더니 깜깜무소식

"장차관보다 구청 말단 공무원이 더 무섭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김모(51)씨는 최근 경기도 A시의 한 구청에 아파트 '세대 구분 공사' 인허가 신청 서류를 냈다가 핀잔을 들었다. 종전의 아파트 세대 구분 사업은 대형 평수 아파트를 간단한 인테리어 공사를 거쳐 중소형 주택 2채로 나누는 사업이다. 국토교통부가 4년 전 '세대 구분 지침'을 내놓을 만큼 적극 장려하는 프로젝트다. 하지만 김씨는 일선 공무원에게서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김씨는 "구청 8급 공무원이 신청서를 내는 제게 '참 답답한 분'이라며 '지침에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으면 국토부에 질의해서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아 와야만 허가해줄 수 있다'고 하더라"며 "어처구니없었다"고 말했다.

인구가 쪼그라드는 지방 소도시조차 공무원 채용을 매년 늘리면서 전국 시·군·구청 등 지자체는 갈수록 비대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 세금 부담은 늘고 공무원 1명당 주민 수는 줄고 있지만, 주민 불편을 어떻게든 해결해주려는 '적극 행정'은 찾아보기 어렵고 규제만 많아지고 있다. 행정안전부 및 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8년간(2008~2015년) 공무원 수는 96만명에서 102만명으로 늘었는데 같은 기간 정부 규제 건수는 1만1000여건에서 1만4000여건으로 3000여건이나 늘었다. 정부는 "규제의 질적 관리에 집중하겠다"며 2016년부터는 규제 건수를 별도로 관리하지 않고 있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규제가 많아질수록 공무원 권한이 커지는 속성 때문에 공무원이 늘면 새로운 규제와 간섭이 생긴다"며 "비대해진 공무원 조직은 규제 완화 정책 실행을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소극 행정'

사업 추진을 위해 지자체와 한 번이라도 협의해 본 사람 중에는 일선 공무원의 복지부동(伏地不動)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가 많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기업 500곳 중 "규제로 투자 계획이 무산되거나 지체된 경험이 있다"고 답한 곳은 37곳으로 전년(21개) 대비 76.2%나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소극 행정'의 근본 원인으로 공무원의 '책임 회피' 성향을 꼽는다. 공무원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책임을 지는 것인데, 선례(先例)가 없거나 법이나 규정에 조금이라도 근거가 나와 있지 않으면 일단 피하고 보려는 속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업 예산을 아낀 공로로 총 4회나 성과금을 받은 국토교통부 배한후 주무관은 "적극 행정을 펼쳐봤자 돌아오는 인센티브가 거의 없고, 괜히 앞장서 일을 벌였다가 나중에 문제 되면 실무자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는 상황이 공무원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고 했다. 중앙 부처 국장급 공무원 G씨는 "사고가 나면 책임을 져야 하니 공무원들은 규정집을 보고 규제부터 찾는 게 몸에 배어 있다"며 "감사원 감사도 적극적으로 행정을 펼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털어놨다.

◇업무 미루기, 전화 뺑뺑이… 속 터지는 민원인

공무원들의 소극 행정과 책임 전가는 주민들의 일상에도 큰 불편을 주고 있다.

서울의 한 4층 빌라 건물 반지하를 사무실로 쓰고 있는 C씨는 지난해부터 극심한 악취와 통행 불편에 시달리고 있다. 빌라 1층에 사는 이웃이 온갖 쓰레기와 생활용품을 공동 출입구와 계단, 반지하 창문 앞에 마구 쌓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C씨는 주민들 서명 동의를 받아 해당 구청과 주민센터에 '무단 적치물 제거 및 통행 방해 행위 시정 조치'를 요청했으나 구청과 주민센터는 "사유지이기 때문에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신고받은 경찰도 "우리가 쓰레기를 치워주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할 뿐 도움을 주지 않았다. C씨는 "주민 다수가 큰 불편을 겪는데도 구청과 주민센터, 경찰서에서 모두 나 몰라라 한다면 행정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개인 업무를 보기 위해 시청이나 구청에 전화해 담당 공무원을 찾을 때 여러 부서를 거치는 이른바 '뺑뺑이'를 당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서울에 사는 D씨는 최근 거주지 인근 공사 현장의 소음과 분진 등 불편을 해결하려고 '120 다산콜센터'에 전화를 건 뒤, 5회 이상 전화를 바꿔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경찰서에 전화해보라고 해서 경찰에 연락했더니 경찰서에서는 구청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구청에 전화한 후에도 네 차례나 전화 '뺑뺑이'를 돌았다. D씨는 "해당 부서로 돌려준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해당 부서에서는 마침 담당자가 출장 중이어서 다른 부서를 알려주겠다고 했고, 그 부서에서는 담당 팀장을 바꿔준다고 하더라"며 "그러더니 담당 팀장이 통화 중이라고 연락처를 남기면 회신하겠다고 했지만 5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지난 2015~2018년 지방 공무원 신규 채용 규모는 46.3%나 증가(1만7561→2만5692명)했지만, 같은 기간 국민권익위원회가 접수한 '고충 민원' 건수는 3만 건 안팎으로 별다른 개선 효과는 없었다.


조선일보 A2면
100주년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