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에서 막장 드라마로… '메그시트' 폭탄 맞은 英왕실

정시행 기자
입력 2020.01.14 03:00

해리·메건 독립선언에 대책 회의
형제·동서간 끊임없는 불화설 등 왕실 추문 낱낱이 드러날까 우려
윌리엄·해리 "불화 없었다" 성명

영국 왕실이 새해 벽두부터 해리(35) 왕손과 부인 메건 마클(38)의 갑작스러운 독립 선언으로 폭탄을 맞은 분위기다. 영국 언론들은 오는 31일 예정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빗대 이 사태를 '메그시트(Megxit·메건의 왕실 탈퇴)'로 명명했고, 엘리자베스 2세(93) 여왕은 급기야 긴급 대책 회의까지 소집했다. 세계 최대 브랜드라는 영국 왕실이 잇단 불화와 추문으로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3일 오후(현지 시각) 북서부 노퍽의 샌드링엄 별장에 찰스(71) 왕세자와 윌리엄(37) 왕세손, 그리고 해리와 정부 관계자들을 불러 해리의 독립에 대한 대책 회의를 열었다. 해리 부부가 지난 8일 "왕실 고위직에서 한발 물러나 영국과 북미를 오가며 살겠다"고 한 지 닷새 만이다. 캐나다에 8개월 된 아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마클은 화상으로 회의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런던 버킹엄궁에서 2018년 7월 열린 영국 공군 창설 100주년 기념행사에 모인 메건 마클 왕손부인과 해리 왕손 부부,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세손빈(왼쪽부터).이미지 크게보기
영국 런던 버킹엄궁에서 2018년 7월 열린 영국 공군 창설 100주년 기념행사에 모인 메건 마클 왕손부인과 해리 왕손 부부,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세손빈(왼쪽부터). /EPA 연합뉴스
손자의 독립 선언을 사전에 전혀 몰랐던 할머니인 여왕과 아버지 찰스는 손자 부부의 선언 직후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부 매체는 여왕이 차남 앤드루(59) 왕자가 지난해 성접대 추문으로 공직에서 물러났을 때보다 더 진노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독립을 허용하되 왕실과의 '미래 관계'에 대한 협상을 제대로 하자는 쪽으로 급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회의에선 향후 해리의 '서식스(Sussex) 공작' 작위 유지 여부, 1500만파운드(약 225억원)에 이르는 해리의 자산 처분, 새로운 지위와 역할 등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리는 "재정적으로 독립해 납세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가 현재 받는 지원 중 정부 예산은 5%에 불과해 왕실에서 상속받은 자산과 왕족으로서 지원은 대부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언론은 이 상황에 대해 왕실이 발 빠르게 '추가 피해 억제(damage control)'에 나섰다고 표현했다. 찰스 왕세자 차남으로 왕위 계승 서열 6위인 해리는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왕실이 이렇게 긴장하는 것일까.

우선 해리 측이 왕실에서 겪은 일을 폭로할 가능성이 꼽힌다. 해리가 2018년 할리우드 배우 출신인 마클과 결혼한 뒤 형 윌리엄 왕세손 부부와의 갈등설 등이 불거졌다. 더타임스·더선 등에 따르면, 마클의 미국 내 홍보팀이 오프라 윈프리 TV 쇼 등을 통해 왕실에 대한 폭로 인터뷰를 저울질하고 있다고 한다. 이혼녀이자 흑인 혼혈인 마클이 자신이 받은 차별 대우와 왕실 내 갈등을 공개할지 몰라 왕실로선 이를 막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윌리엄·해리 형제가 갖는 상징성이 사라지는 것도 왕실로선 큰 손실이다. 이들의 어머니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비극적 죽음으로 타격을 입은 영국 왕실은 지난 20여년간 두 젊은 왕손의 성장과 우애 스토리에 기대 대중의 지지를 회복한 측면이 컸다. 각자 아름다운 평민 여성과 동화 같은 결혼을 하면서 이 '환상의 4인방(fab four)'이 왕실에 활력과 안정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지난 2년간 형제의 불화설이 끊이지 않았고, 이번 독립 선언 과정에서 더 증폭됐다. 윌리엄이 이혼 가정에서 자란 마클을 처음부터 못마땅해했고, 전통적 왕실 며느리상에 충실한 윌리엄의 부인 케이트 미들턴(38)도 손아래 동서인 마클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해리의 대변인 격인 한 방송인은 "윌리엄 측의 괴롭힘(bullying)이 독립의 큰 이유"라고 말했다고 더타임스가 이날 보도했다. 논란이 되자 윌리엄과 해리 측은 이날 대책회의 전 공동성명을 내고 "신문에 우리 관계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false story)가 실렸다"며 "이런 언어를 쓰는 것은 모욕적이며 유해하다"고 했다.

하지만 둘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 관계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윌리엄 왕세손은 최근 "난 늘 동생에게 한 팔을 두르고 살았는데 이제 남남이 됐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BBC는 해리와 마클이 독립 후 자유로운 활동을 하는 것도 왕실엔 '지뢰밭'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마클은 이미 디즈니와 계약해 방송·영화 활동을 재개키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왕족이 외국에서 배우로 자유분방한 활동을 하며 세간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왕실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또 이 부부는 '서식스 로열'이란 상표권을 등록해 의류·인쇄물 판매와 복지 사업에 활용키로 했다. 영국 왕족이 공직에서 물러난 경우는 있지만 이렇게 상업 행위를 하는 것도 전례 없는 일이다.


조선일보 A20면
100주년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