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더러 적폐라더니… 이런 교과서 만들려고 그 난리 쳤나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0.01.14 03:00 수정 2020.01.14 10:21

[김기철의 시대탐문] [5] 국정교과서 필자 이재범 교수가 본 새 한국사 교과서

"南北 여전히 교착상태인데 판문점 회담 사진을 왜 싣는지… 이런 책으로 학생 가르쳐도 되나
당시 필진 '부역자'로 몰려 문화재위원 사퇴 압박당하고 소속학회서 자격 정지 징계 받아"

"'한반도의 긴장이 2018년 문재인 정부의 노력으로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니, 교과서를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 정권에 코드 맞추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지난 9일 만난 이재범(69) 전 경기대 부총장은 최근 나온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펼치다 한숨을 쉬었다. "우릴 부역자, 적폐 취급하더니 이런 교과서 만들려고 그랬나."

고려시대를 전공한 이 교수는 지난 2017년 나온 국정 한국사 교과서 필자 31명 중 하나다. 국정교과서는 '권력에 의한 역사 쓰기'로 비난받으며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 적폐로 꼽혔고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폐기됐다. 이 교수는 '부역자'로 몰리면서 재임 중인 문화재위원 사퇴 요구까지 받았다. 2018년 9월 취임한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국정교과서 필자인 문화재위원 3명(이배용, 최성락, 이재범)을 겨냥해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며 사퇴를 압박했다.

이재범 전 경기대 부총장은 "나도 한때는 국정 교과서를 반대했다. 하지만 이런 편향된 검정 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걱정된다"고 했다. /조인원 기자
―국정교과서엔 왜 참여했나.

"교사 경험도 있어 원래는 반대했다. 6~7년 전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제자들과 한국사 교과서를 검토하다 깜짝 놀랐다. 정치적 편향이 너무 심했고, 이런 교과서로 아이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이고 북은 공화국 수립이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라 정부민인가. 국정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국민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통일된 사관(史觀)으로 이뤄진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정교과서 필자로 알려진 후 어떤 일을 겪었나.

"한마디로 적폐 취급 당했다. 정권 교체 직전인 2017년 문화재위원(임기 2년)을 연임했는데 '알박기'라며 모욕 줬다. 한 분은 전임 회장으로 있던 학회에서 징계까지 당했다. '선생님께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며 글을 올린 제자도 있었다. '교과서를 읽어 보기나 했느냐'고 물으면 다들 읽은 적 없다고 했다."

이 교수가 언급한 '징계'는 한국고고학회장을 지낸 최성락 목포대 명예교수를 말한다. 최 교수는 회장 임기를 마친 직후인 2017년 한국고고학회에서 2년간 회원 자격 정지를 당했다. 현대사를 집필한 육사 교수는 지난해 10월 진급 예정자 명단에 올랐다가 반대 단체의 '진급 취소' 운동에 시달렸다.

―지난달 전시본으로 나온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8종)를 보니 어떤가.

"이런 걸 만들려고 그 난리를 쳤나 싶다. 1948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안을 '유엔 감시 아래 선거가 실시된 지역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교묘하게 썼다.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한 유엔 결의안을 '38선 이남의 유일 합법정부'로 왜곡한 것이다."

―현 정부를 미화하는 내용도 있다.

"남북 관계는 여전히 교착상태인데, 판문점 회담 사진을 왜 싣나. 현 정부는 물론 역대 정부도 아직 평가를 기다려야 하는 게 많은데, 무슨 근거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공(功)을 더 많이 싣고,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잘못한 점을 부각시키나. 어떤 교과서는 국정교과서 추진을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 실정으로 썼는데, 이렇게 가르쳐도 되는 것인가."

―이 교과서가 배포되면 학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3년간 가르쳤기 때문에 전교조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을 잘 안다. 당시 학교 분위기가 워낙 권위적이었던 탓에 남아 있었으면 나도 열렬한 전교조 활동가가 됐을지 모른다. 지금 일선 학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교사들이 이런 교과서로 현대사를 어떻게 가르칠지 뻔하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민중사학을 내건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오래 활동했고 한국군사사학회장을 맡고 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얼마 전 낸 역사기행서 '나의 일본여행'을 건넸다. 속표지 저작 목록에 국정 한국사교과서(2017)가 올라 있었다. "내가 별나서인가. 국정교과서 쓴 걸 후회하지 않는다. '국정' 시스템에 대한 찬반 의견은 있겠지만 책 내용만큼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신념은 단단했다.


조선일보 A23면
3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