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노론의 망령에 사로잡힌 한국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20.01.14 03:14

400년 전 서인의 쿠데타
권력 조직 자기 세력 채운 뒤 도덕률 앞세워 정적 제거
쇠락·멸망의 역사, 두렵지 않은가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1623년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히며 내세운 명분은 도덕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살해한 패륜아와 명나라를 섬기지 않으려는 지도자를 쫓아낸다고 했다. 그런데 쿠데타 성공 직후 그들이 은밀히 결의한 진짜 목표는 따로 있었다. '물실국혼 숭용산림(勿失國婚 崇用山林)'이다.

'물실국혼'은 왕비를 대대로 서인 가문에서 배출하겠다는 뜻이다. 처족(妻族)으로 얽힌 권력 네트워크를 고착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이다. '숭용산림'은 권력에서 배제됐던 선비들을 중용한다는 뜻이다. 권력 조직을 자기네 세력으로 채우겠다는 집념이다. 한번 차지한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려는 원대한 계획이다. 남인 남하정의 '동소만록'(1740년)에 기록된 내용이다. 계획은 성공했다.

여흥 민씨인 고종 왕비와 순종 황후까지 역대 왕비는 서인-노론에서 배출됐다. 영·정조 때 잠시 남인들이 기용된 적은 있지만 조선 후기 권력 조직은 노론으로 채워졌다. 서인, 나아가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老論)은 대한제국 종말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지구상 유례가 없는 300년 초장기 독재를 그들은 시도했고, 이뤄졌다.

초장기 독재가 가능했던 무기는 도덕률(道德律)이었다. 스스로를 군자라고 했고 정적은 소인이라고 멸시해버린 것이다. 권력 집단 스스로 도덕 기준을 설정하고 이에 반하는 세력은 정적으로 처단해버린 것이다. '주자의 아름다운 글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찍어버리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자가 생산한 도덕적 우월성과 절대 권력이 융합하니 전지전능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도덕률을 읊조리는 노론이 판친다. 서울대 교수 조국 사태를 논리로 비판하는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을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종걸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했다. 소설가 공지영은 아예 "안타깝다"고 조롱했다. 권력이 도덕률을 스스로 설정하도록 방치하면 이런 섬뜩한 일이 벌어진다.

더 무서운 것은 숭용산림이다. 지난주 청와대는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던 검찰청을 송두리째 갈아치워 버렸다. 서울중앙지검장에는 대통령 대학 후배를 앉혔다. 법무장관은 "지역과 기수를 안배한 균형 있는 인사"라고 했다. "검찰총장이 내 명을 거역했다"는 전근대적이고 초법적인 명분도 스스럼없다. 지난 3일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주민이 법원 행정권을 국회가 장악할 수 있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도덕을 앞세워 전 분야를 자기편으로 채워버렸다. 숭용산림을 통한 권력 고착 기도에서 단 1밀리미터도 벗어나지 못했다. 오로지 자기들만 국가 경영을 할 권능과 자격이 있는 군자이며, 정적을 소인배로 낙인찍어 몰살한 그 행태다.

그런데 노론의 초장기 독재가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서인) 무리는 이용되는 것을 즐겁게 여겨 끓는 물이나 불 속에 들어가 죽더라도 피하지 않았다. 반면 남인은 본래 빈틈이 많아서 스스로 경계하는 일에 소홀하였다.'('동소만록') 광기 앞에서 야당이 맥을 못 추고 제정신을 못 차렸다는 뜻이니, 이 또한 21세기 대한민국 풍경과 똑같다.

그래서 그 나라가 어떻게 됐나. 자칭 군자가 벌인 타칭 소인배의 잔혹사로 점철됐다. 국가 생산력은 갈수록 약해졌고, 백성은 가난했으며 그 가난한 나라 자칭 군자들은 황톳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떡고물로 배를 채웠다. 도덕으로 포장한 권력욕 광기의 결말은 공동체의 그런 쇠락과 멸망이다. 두렵지 않은가.


조선일보 A35면
100주년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