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97] 그리움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입력 2020.01.13 03:10

그리움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가
험한 벼랑 굽이굽이
세월처럼 돌아 간 백무선
길고 긴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겹겹이 둘러 앉은
산과 산 사이
작은 마을 집집마다
봇지붕 우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 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여
내내 그리운
그리운 그곳
북쪽엔
눈이 오는가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가
---1945 겨울 서울에서

―이용악(1914~1971)

눈을 기다립니다. 내내 쏟아지는 함박눈을 기다립니다. 그게 다예요. 거기 다 있어요. 눈 쏟아져 쌓여가는 그 고요 속 옥색 소란 속으로 내 심사를 섞어 넣으면 놀랍도록 크고 넓은 긍정이 오지요. 거기 마구 뒹굴고 싶고 거기 마냥 걸어가고 싶지요. 방향도 없이.

눈은 실용은 아니에요. 내리는 눈에 귀가 걱정 같은 건 하는 게 아니에요.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을 마냥 풀어놓고는 바라볼 뿐이에요.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발 속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같은 운명이게 하는 눈발 속에 남루마저도 충만이 되는 그 시간을 소년은 오래 조용히 바라보았을 겁니다. 후일 어른이 되어 눈 귀한 서울 복판의 어느 팍팍한 삶 속에서 잠 못 이룹니다. 일어나 앉아 '북쪽'의 눈을 부릅니다. 저절로 일정한 리듬을 이룬 행간 속에 고향 함경도 산협 마을의 '봇지붕'과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검은 지붕'의 화물차가 불려 나옵니다. 눈 뒤에 가려진 수많은 것이 불려나옵니다. 어느 순간 두 눈 밑에 얼룩이 졌을 겁니다. 그게 시지요. '모노톤의 모던'이 '그리움'이란 센티멘털을 업고 가는 시입니다.



조선일보 A34면
3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