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파치노의 탱고 뒤에 숨은 위스키

이용재 음식평론가
입력 2020.01.11 03:00

[아무튼, 주말- 이용재의 필름위의만찬] (17) '여인의 향기'와 잭 다니엘스

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퇴역 육군 중령 프랭크 슬레이드(알 파치노)는 조카 집에 얹혀살며 잭 다니엘스 위스키와 시가로 시간을 보낸다. 추수감사절 연휴 자신을 돌보러 온 찰리(크리스 오도널)를 데리고 뉴욕 맨해튼에 간 슬레이드는 유서 깊은 호텔에 묵으며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탱고를 추는 등 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호사를 만끽한다. / 영화 캡처
"좀 더 다가와. 너를 자세히 보고 싶으니까. 찰리라고? 정말 멍청하군. 프랭크라고 불러. 슬레이드씨라든가. 중령이라고 불러도 좋고. 선생님은 쓰지 마. 린든이 제리 포드를 임명했지. 68년 파리 평화회담 담당관으로. 덕분에 훈장을 놓치고 G-2로 갔지. 하!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유난히 안온했던 금요일 저녁, 일부러 좋아하는 떡집까지 찾아가서(약 30분 거리) 이것저것 사다가 펼쳐 놓고 '여인의 향기'(1993년)를 보았다. '순수의 시대'나 '아웃 오브 아프리카' 등, 중·고등학교 때 제목만 주워 들었지 보지는 못했던 1980~1990년대 영화들을 최대한 찾아서 보는 중이었다. 사실 '여인의 향기'는 두세 번 시도했으나 첫 5분을 못 넘기고 접은 영화였다. '여인의 향기'라는 제목도 그렇고 도입부에 프렙 스쿨(prep school·미국에서 일류대 진학을 목적으로 상류층 자제들이 가는 사립 기숙 고등학교)이 등장하다 보니 미성년자의 일탈 이야기 같은 영화일 거라 멋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의 5분을 넘기니 알 파치노가 등장했고, 나는 그의 존재감에 바로 압도되어 먹던 떡을 떨궜다. 그리고 떡이 뒹구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최근 화제 속에 공개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최신작 '아이리시맨'이 더할 나위 없이 지루했을뿐더러, 그 가운데 알 파치노를 위시한 주연진의 노화가 서글펐던지라 그의 존재감이 반갑고 또 반가웠다.

알 파치노의 극중 역할은 퇴역 육군 중령 프랭크 슬레이드이다. 그는 군 시절의 사고로 시력을 잃었지만 보훈원을 마다하고 조카의 집에 딸린 별채에 얹혀살며 잭 다니엘스 위스키와 시가로 시간을 보낸다. 추수감사절 연휴 동안 시댁에 가야 하는 조카는 프랭크를 돌봐 달라는 아르바이트 공고를 프렙 스쿨에 내고, 이를 본 찰리(크리스 오도널)가 찾아온다. 26년이나 군 생활을 한 프랭크는 초장부터 찰리에게 빡빡하게 굴지만, 크리스마스에 집에 갈 항공편 비용을 벌어야 하는 찰리는 그저 사나흘만 중령의 집에서 잘 버티면 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조카가 떠나자마자 프랭크는 찰리를 부려 짐을 챙겨서는 보스턴에서 뉴욕 맨해튼으로 여행을 떠난다.

예상치 못한 여정은 온통 고급 일색이라 한층 더 놀랍다. 항공편은 일등석이고, 숙소는 맨해튼 최고 전통을 자랑하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이다. 월도프 아스토리아는 사과·호두·셀러리·포도를 버무리는 '월도프 샐러드'나 대표적 브런치 메뉴 '에그 베네딕트'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식사는 1907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레스토랑 '오크 룸'(뉴욕 플라자 호텔 로비에 있다가 지난 2011년 문 닫았다) 같은 곳에서 24달러짜리 햄버거를 즐긴다.

이런 가운데 중령은 신기하게도 술만은 저렴한 걸 찾는다. "잭 다니엘스 더블(double·약 90㎖), 온 더 락스(on the rocks·얼음 잔에). 술은 어디 있지? 여긴 술이 지천일 텐데." 잭 다니엘스(Jack Daniel's)라면 정말 지천에 널린 술이다. 1875년에 태어나 올해로 145살. 특히 영화가 개봉되었던 1990년대라면 록밴드 건스 앤 로지스의 기타리스트 슬래시가 병을 든 채로 사진을 종종 찍는 등, 메탈리카가 좋아했다는 독일의 약초주 예거마이스터와 더불어 '로커의 술'이라는 명성을 누리기도 했다.

그런 사실이 잭 다니엘스를 더 고급스러운 술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국내에서도 쉽게 찾아 마실 수 있듯 잭 다니엘스는 그저 대중적인 미국 위스키일 뿐이다. 다만 잭 다니엘스를 포함한 미국 위스키의 족보는 술 자체가 목구멍으로 술술 잘 넘어가는 것에 비해서는 언제나 좀 더 복잡하다.

으레 미국 위스키를 '버번(Bourbon)'이라 일컫는데 사실 버번은 켄터키주에서 만드는 증류주의 통칭이다. 특유의 검은색 딱지에 흰 글씨로 크게 강조하듯 잭 다니엘스는 켄터키 바로 아래인 테네시주의 위스키이다. 둘은 어떻게 다른가? 사실은 큰 차이 없다. 켄터키주의 버번은 옥수수를 원료 곡식의 51% 이상 써 빚어야 하며 62.5도로 맞춰 속을 태우듯 그을린 참나무통에 넣어 숙성시키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덕분에 특유의 쏘는 맛과 바닐라 향을 지니는데 테네시 위스키도 버번의 조건에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프랭크와 찰리의 고급 여정은 일등석과 리무진, 24달러짜리 햄버거에서 그치지 않는다. 둘은 고급 정장까지 맞춰 입고 인근에 사는 프랭크의 형이 사는 집에 예고 없이 찾아간다. 추수감사절 당일 저녁이니 미국인의 기준으로는 혈육이라도 무례할 수 있는 상황에서, 프랭크는 예외 없이 '지천에 널린' 잭 다니엘스를 청해 마시고는 분위기를 박살내 버린다. 그런 가운데 찰리는 프랭크가 객기로 인한 사고 탓에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제야 그의 삶이 잭 다니엘스에 푹 젖어 있는 이유를 완전히 헤아린 찰리는 고급스러운 여정 끝에 도사리고 있는 불길함의 실체를 확인한다.

중령이 잭 다니엘스를 얼마나 맛있게 마시는지, 분위기에 휩쓸려 낮술을 마시며 원고를 써보았다. 마침 집에 조니 워커 블랙이 있었다. 지면에 맹세컨대 프리랜서 경력 11년에 낮술을 마시며 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만 굳이 고백하자면 중령처럼 위스키에 젖어 살았던 시절은 있다. 7년쯤 전 처음으로 힘이 많이 들어가는 책을 쓸 때였다. 요령도 전혀 없어서 눈 뜨면 쓰고 눈 감기면 잔다는 생각으로 시간 대중 없이 일을 했었다. 쓰기는 잘 썼으나 잔뜩 감아 놓은 태엽이 풀리지 않듯 그날 치의 긴장이 전혀 풀리지 않아서 잠을 통 이루지 못했다. 결국 잠이 올 때까지 위스키를 조금씩 마시다 보니 점차 양이 늘어 누운 자리에서 반 병(375㎖)까지 마시게 되었다. 그렇게 한 6개월을 보내며 책은 다 썼으나 대신 건강이 엄청나게 나빠졌고, 의사 선생님에게 크게 혼난 이후에야 이날 이때까지 더 효율적이면서도 건강하게 일하는 요령을 조금씩 다듬고 있다. 물론 낮술을 마시며 쓴 이 원고는 정신을 차린 뒤 전부 다시 고쳐 썼다.

조선일보 Y4면
100주년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