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순간 15. 한국인의 혼을 찍는 사진가 이갑철

조인원 기자
입력 2019.12.10 14:19 수정 2019.12.10 14:25
<창작의 순간 15> 한국의 혼, 기운을 찍는 사진가 이갑철

이갑철, 적막강산
현재 모습을 이미지로 기록하는 기계로 발명된 카메라는, 눈앞에 보이는 실체만을 담는다는 것으로 기록의 도구로 지닌 가능성과 함께 사진이 지닌 숙명적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종종 사진이 과연 예술인가라고 시비 거는 사람들은 스치는 현실과 렌즈 파인더 사이에서 과연 사진가의 예술적 상상력이 얼마나 표현되고 구현되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사진가가 모델을 섭외하고 상황을 설정해서 촬영하는 ‘메이킹 포토(making photography)’나 찍은 사진을 포토샵으로 합성하는 사진은 전통적인 사진가들에게 사진(photogrpahy)이라기보다 미술(art)로 분류된다.
"
"
이와 반대로 사진 그 자체인 다큐멘터리 방식의 기록을 하면서도 사회적 메시지 대신 예술적 시선과 기록으로 촬영하는 방식을 주관적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분류한다. 미국에선 1930년대 대공황기를 기록한 워커 에반스(Walker Evans)나 1950년대 ‘미국인들’이라는 사진집으로 스위스 이민자의 시선으로 미국 사회를 비판한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가 이런 사진에 속한다. 사진가 이갑철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스트레이트 사진가로 프레임 안에 과감한 구도, 사선이나 흔들리는 앵글을 통해 한국의 전통적인 소재를 다루는 사진가로 알려져 있다.

서울 송파구에 본관을 둔 한미사진미술관이 최근 시내 한가운데인 삼청동에 별관을 열었다. 별관 오픈 전시회로 이갑철의 ‘적막강산’ 사진전(내년 1월 15일까지 전시)이 요즘 열리고 있다. 전시회엔 도시 징후라는 부제가 있었다. 지난 4일 마침 삼청동 전시장에 있던 이갑철을 만났다. 기자는 언젠가 한금선 사진전의 뒤풀이 자리에서 잠깐 인사만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갑철, 충돌과 반동
사진가 이갑철이 유명해진 계기엔 2002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충돌과 반동’이라는 전시가 컸다. 동해 풍어제를 촬영한 것이지만, 사진들 안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면서 보일 것 같은 이상한 것들로 가득하다. 이갑철은 자신이 촬영한 사진들 안에서 사람들이 상상할 여지를 남긴다. 잘린 소머리를 뒤집어쓴 무녀, 제삿날 살아있는 사람들이 먹을 밥상에서 마주보이는 수저들, 할머니의 머리 위로 걸린 구름과 그 사이에 꽃 등은 이미지가 연결되지 않고 충돌하면서도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인 것처럼 보여준다.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해석을 맡기거나 질문을 던진다.

이갑철, 도시징후
이번 전시에 걸린 사진들도 어둠과 빛의 모호한 경계에서 사람들의 형상을 또렷이 보여주는 대신 그림자와 흔들리는 발걸음, 유리에 반사된 형체들이 강조되었다. 어떤 의미일까? 이갑철에게 물었다.

Q. 자연에서 도시로 돌아온 것인가.
- ‘이갑철’하면 한국정신을 찍는다고 하는데, 한국의 사회적인 관점을 80년대부터 찍어왔고,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로버트 프랭크가 추구했던 주관적 다큐멘터리를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도시가 새삼스러울 건 없다.
나는 도시를 남들과 다르게 본다. 도시를 빌딩과 인간군상, 그리고 빛이라고 본다. 도시엔 개인이 안 보이고 인간 군상이 보일 뿐이다. 가끔 어떤 것들이 연상되는가 하면, 서양에서 저승은 어둠 속에서 저 멀리에서 아득하게 빛이 비춘다. 역광으로. 그때 인간들이 실루엣으로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도시에서는 인간들이 그렇게 느껴진다.

Q. 디지털 카메라로 인해 사진 작업의 변화가 있다면.
- 흐름을 빨리 알아채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빠르게 정리가 되니까 좋기도 하지만 안 보이는 것까지 고민해야하기 때문에 깊이로만 보면 필름이 더 오래갈 여지가 있다. 디지털은 모니터로 확인이 되는 순간 깊이감이 떨어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바로 확인되는 것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이갑철, 도시징후
Q. 사진을 하게 된 계기는.
- 집이 진주다. 70년대 중반 고등학교 1학년때 카메라점 가서 빌려서 찍고 갖다 주고 그랬다. 취미로 하다가 누구한테 배운 적이 없었다. 1976년에 ‘월간 영상’이라는 사진잡지에 교복 입는 신발에 물이 반사된 것을 찍어서 보냈더니, 당시 심사했던 육명심 선생이 보고 놀랬다. 사진가로 오기까지 큰 인연이었다. 육명심 선생이 계신 신구대학 사진과에 입학했다. 이후로 줄곧 주관적 사진을 추구했다.

Q. 라이카를 망치로 내려친 적이 있다고 들었다
- 대학을 다니다가 남들처럼 라이카를 한 대 샀다. 라이카 M3를 샀는데 카메라가 너무 낯설고 어려웠다. 마음은 바쁜데 사진을 찍진 못해서 너무나 갈등이 컸다. 이러다 사진을 못하겠구나 싶어서 군대를 가기 전에 나를 이렇게 괴롭히던 카메라를 없애야 겠다는 생각에 망치를 갖고 와서 라이카 M3를 내려쳤다.
그때 갖고 있던 그 많던 사진집도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만 빼고 다 버렸다. 그 사진집은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라이카도 안 깨졌다. 위만 약간 흠이 나고 튼튼했다. 1980년에 한 30만원 주고 산건데 결국 팔았다. 나를 괴롭히는 것을 버리고 군대를 갔다. 하지만 군대에서 하루도 사진을 잊은 적이 없었다. 대신 나한테 맞는 카메라를 찾아서 하리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난 사람들에게 지금도 말한다. 스마트폰이든 디지털이든 자기한테 맞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라고.

Q. 유명해지기까지 다큐사진가로 버티기 힘들었지 않았나. 어떻게 작업했나.
- 프리랜서 다큐작가로 있다가 계몽사에서 백과사전과 잡지에 들어가는 사진기자로 3년 정도 일했다. 경주 첨성대, 식물들 같은 사진을 찍으면서도 내 작업을 계속 이어갔다. 이후에 웅진출판사에 입사해서 한국의 생태계를 찍었는데, 5년간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주제를 잡아서 꾸준히 내 작업을 이어갔다.


이갑철, 충돌과 반동
Q. 일을 하면서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 동시에 하나만 집중해도 부족한데 동시에 두 개를 같이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소재를 만났을 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하지 말고, 하나를 어떤 용도로 쓸지 생각을 하고 찍었다. 계몽사 백과사전은 객관적, 보편적으로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애초부터 이상하게 찍어왔기 때문에 그것에 적응하는데 좀 힘들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판단을 빨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이후 프리랜서 작가로 ‘모닝캄’, ‘지오’, ‘뿌리 깊은 물’ 같은 잡지에 기고하며 일했다.

Q. 앞으로 어떤 사진을 찍을 것인가.
-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사진가로서 이 땅의 무언가를 하고 싶다. 한국의 사계를 그리고 싶다. 꽃을 보면 예쁘다는 건 누구나 찍는다. 그 밑에는 서러움 같은 게 있다. 그런 것을 찍고 싶다. 나도 밑바탕까지 가면 동서양 구분이 없다. 결국은 에너지 싸움이다.

Q. 최근 사진들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 사진 본연의 얘기를 하지 않는 게 안타깝다. 스트레이트 포토가 많지 않은 게 이상하다. 보도사진, 옛날 사진으로나 인식하지 스트레이트 사진하는 사람이 힘들어진다. 나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거니까 계속 가지만, 젊은 친구들은 흔들릴 수 있다. 내가 무엇을 토해내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젊은 사람들이 너무 게임하는 식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불만이다.



100주년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