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칼럼] 586 더는 안 된다, 안 되게 해야 한다

류근일 언론인
입력 2019.12.10 03:17

정의·진리·도덕 앞세우며 '신적폐' 만든 586 운동권, 실은 위선적 기득권 집단
패악은 여기까지라야 한다… 공수처법 강행으로 덮으려다가 위기는 100배로 늘 수 있다

류근일 언론인

"야 백원우, 너희 죄받는다. 당신이 진지하게 책임졌다면 안 죽었을 거 아냐? 뭐가 됐든지, 네가 시켰을 거 아냐? 지금이라도 너희 잘못한 거 다 불어. 김기현 울산시장 건(件), 그거 업무 대상이야 아니야? 아니잖아! 왜 정치인 것은 수사 이첩하고 정작 수사 이첩해야 할 유재수 감찰 무마 건은 쌈 싸 먹었냐? 정적(政敵) 찍어내기 사찰, 너희가 그렇게 싫어하던 70년대 80년대 독재 정권보다 더한 거 아냐?"

이건 전 청와대 특감반 김태우 수사관이 분노로 온몸을 떨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한 절규다. 이른바 '백원우 특감반원'으로 일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A 수사관에 관한 진실은 현재로선 전모를 알 수 없다. 다만 김태우씨는 A 수사관 사망 책임이 그의 상관이던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에게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윤석열 검찰이 그 진상을 속속들이 파헤쳐 주길 희망할 따름이다.

그러나 수사가 마무리되기 전에라도 A 수사관의 죽음, 청와대 별동팀의 김기현 첩보 의혹,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 그리고 우리들병원 대출 사건 등 일련의 호박 넝쿨을 계기로 운동꾼 수뇌부가 총체적 자괴 현상을 빚고 있는 것만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운동꾼이 자살골을 넣고 있는 꼴이다. 역대 정권이 다 말기로 갈수록 악수(惡手)를 두다가 진 수렁에 빠져 허우적댔다. 586 NL(민족 해방) 패거리도 예외가 아니다. 자기들은 정의·진리·도덕 그 자체라고 워낙 큰소리 땅땅 쳤던지라 그 타격은 훨씬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태우씨가 말한 운동꾼 패거리의 '옛 독재 정권보다 더한' 행패 밑바닥엔 과연 어떤 정체성이 도사린 것일까? 왜 정의·진리·도덕을 내세운 정권이 그들이 매도했던 '구적폐'보다 더 심한 '신적폐'를 만들어냈을까? 자유·평등·박애를 부르짖던 프랑스 혁명 과격파,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왜 구체제 뺨치는 악마성으로 질주했는가? 그 죄와 악의 인성(人性)적 원인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 게 '네차예프 혁명가 교리문답'이란 것이다.

세르게이 네차예프는 1840~1880년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 혁명 청년이었다. 그는 무기징역형을 살다가 35세에 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네차예프는 '혁명가 교리문답'이란 걸 만들어, 혁명가는 오로지 혁명만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다 하는 몰(沒)도덕적이고 초(超)윤리적인 괴물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가는 법률·도덕·인습에 매여선 안 된다. 부도덕과 범죄를 주저해서도 안 된다. 감사의 염(念), 명예 의식, 감상주의, 낭만주의, 사랑에 빠져도 안 된다. 부모·자식, 친구, 애인 관계에 묶이면 더욱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반도 남북에도 비슷한 교리가 있다. 주체사상 10대 원칙이란 것이다. "김일성 동지를 절대화해야 한다. 그 권위를 훼손하려는 조그만 요소도 비상 사건화해 비타협적 투쟁을 해야 한다. 김일성 교시를 지상 명령으로 여기고 그 심려를 덜어드리는 것을 신성한 의무로 삼아야 한다." 위 두 교리는 혁명을 위해선 무슨 짓이든 다 해도 좋다는 면죄부이자 초인 의식이었다.

우리 사회의 586, 즉 과거 386 집단은 그러면 어떤가? '386세대 유감'이란 책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가난한 부모 등에 올라타 독재자가 이룬 성장의 과실을 먹으며 10대를 살았다. 다른 독재자가 내건 교육 개혁으로 20대를 열었다. 반(半)독재자가 해준 200만 가구 아파트 청약으로 중산층이 되었다. … 386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눈감고 허용해준 소악(小惡)들이 모여 만든 거악(巨惡)…" "권력 독점, 사교육 시장 장악, 공공기관 법인 카드로 내연녀와 데이트…"란 기사도 있었다. 386은 말이 혁명 세대이지 실은 위선적 기득권 집단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그들의 패악은 여기까지라야 한다. 더는 안 된다. 안 되게 해야 한다. 안 될 것이다. 울산 관권 선거가 입증될 경우 그것은 3·15 부정선거에서 4·19혁명에 이른 전례를 상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공작 산실은 내무부장관·경찰이었다. 지금은 청와대·경찰이 도마에 올랐다. 최고 수뇌부가 직접 개입한 부정선거 의혹이란 뜻이다. 이걸 공수처법 강행 처리로 덮으려 했다가는 위기는 100배로도 늘 수 있다. '고래 고기'로 될 일이 아니다.



조선일보 A38면
100주년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