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파 맏형 이란, 1000명 학살… 이라크선 총기 난사 150여명 死傷

정시행 기자
입력 2019.12.09 03:00

시아파 벨트 3국, 반정부 시위 격화… 40년만에 최대 위기
경제난 빠진 레바논은 적대시했던 美·사우디에 원조 요청

중동에서 지난 10월 시작된 반미(反美) 시아파 벨트의 시위가 점점 심상찮은 국면으로 가고 있다. 시아파 벨트의 '맏형'인 이란의 반정부 시위 폭력 진압으로 3주간 1000명 이상 사망했다는 미국 정부의 추산이 나왔다. 이라크에선 시위대에 대해 '학살'에 가까운 공격이 발생했다. 레바논은 헤즈볼라 정권이 정치·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해 적대 세력이었던 서방과 수니파 국가에 원조를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란이 40년 전 반미 이슬람 혁명을 이룬 뒤 구축해온 이들 동맹이 이렇게 한꺼번에 흔들리는 건 전례가 없었다. 국민의 먹고사는 기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곳에서 이념과 종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관 운구하는 이라크 시민들 - 7일(현지 시각) 이라크 남부 나자프시(市)에서 시민들이 전날 수도 바그다드 반정부 시위 때 괴한들의 총기 난사로 숨진 한 시위 참가자의 사진을 부착한 관을 운구하고 있다. 로이터·AP통신은 6일 바그다드의 시위 현장인 도심 광장에서 중무장한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고 흉기를 휘둘러 25명이 숨지고 130여명이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EPA 연합뉴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시위 현장에서 6일(현지 시각) 중무장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고 흉기를 휘둘러 25명이 숨지고 130여명이 부상했다고 로이터·AP 통신이 보도했다. 이날 밤 시위대가 모여 있던 도심 광장에 괴한들을 태운 픽업트럭 4대가 들이닥치더니 시위대와 경찰, 취재진에게 무차별 발포하고 주차장에 불을 질렀다. 외신과 인권단체들은 한자리에서 수십명이 숨진 이 사건을 '학살' '살육'으로 표현하고, 친(親)이란 민병대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이날 시위를 지지하는 유력 성직자의 자택에 드론을 동원한 공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라크에선 두 달 전부터 민생난과 정부 부패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져 군경의 진압으로 450명이 사망하고 2만여명이 부상했다. 도중에 아딜 압둘-마흐디 총리가 전격 사퇴했지만,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이번 괴한 총격 사건 등으로 더욱 악화돼 "내전으로 갈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앞서 미 국무부의 브라이언 훅 이란 특별 대표는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다양한 정보를 종합 분석한 결과, 이란 당국의 시위 폭력 진압으로 1000명 넘게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간 여러 인권단체와 외신들이 이란 시위의 피해 규모에 대해 '최소 180명에서 450명 이상'이라고 추정했지만, 미 정부가 발표한 것은 처음이다.

이란은 서방 언론의 취재를 막고 있어 확인은 안 되지만, 현지인들의 소셜미디어 등에 따르면 정권 엘리트인 혁명수비대의 발포로 어린이 등 100명 이상이 한꺼번에 사망한 곳도 있다고 한다. 또 40년 만에 처음으로 최고지도자 등 혁명 집권 세력을 직접 비난하는 구호가 등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레바논은 6일 처음으로 미국과 프랑스·이탈리아 등 서방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수니파 국가들에 경제 원조를 공식 요청했다. 이미 사임을 발표한 사드 하리리 총리는 각국에 서한을 보내 해당 국가들에서 밀과 약품, 휘발유와 원자재 등 물품을 수입할 때 신용거래(외상)를 보장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정부가 11일 파리에서 레바논 지원을 위한 국제회의 개최를 추진 중이라고 AFP통신이 전했다.

레바논에서 의회 등 실권을 장악한 세력은 서방이 테러 단체로 규정한 헤즈볼라다. 헤즈볼라 세력은 정치·안보 위기나 경제 위기가 터지면 최대 후원자이자 '맏형'인 이란에 도움을 청해왔다. 그러나 국제 제재로 경제가 파탄나고 더 큰 소요를 겪는 이란도 도움을 줄 처지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헤즈볼라가 결성된 1980년대 이래 처음으로 레바논의 시아파 국민조차 헤즈볼라 세력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시아파 국가들의 위기를 초래한 공통 요인은 극심한 민생난과 빈부 격차, 그리고 이를 방치한 정권의 무능과 부패다. 하나같이 전기·수도, 연료, 식량 공급 체계 등이 무너지면서 국가 기능이 총체적으로 마비됐다. 이란에선 휘발유값 인상이, 레바논에선 국민 메신저 요금 부과가, 이라크에선 전력난이 시위에 불을 댕겼다.

뉴욕타임스는 8일 4년간 이어진 레바논의 '쓰레기 대란'을 집중 조명하고 "레바논 등 중동의 반정부 시위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라고 했다. 지난 2015년 정부가 쓰레기 매립 사업권을 둘러싼 정권 핵심들의 이권 다툼이 심해지자 처리장을 폐쇄해버리면서 손을 놨는데 아직도 해결을 못 하고 있다고 한다. '중동의 파리'로 불렸던 수도 베이루트 도심과 지중해 해변은 수년간 마구 버려진 쓰레기가 높이 10m에 이르며, 악취와 전염병이 들끓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이란의 혁명 2·3세대, 이라크와 레바논의 친이란 집권 세력은 서방 수입품 등으로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 국민에겐 '반미 투쟁과 혁명 정신'만을 강조해왔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에 따르면, 이란 주도로 같은 시아파 동맹인 시리아의 내전에 군 병력을 투입할 당시, 이라크·레바논 정권은 서민 자식들을 차출해 보내고 자신들은 전쟁 이권만 챙겼다. 시아파 국민이 많은 국가에서 처음으로 시아파 정권을 향한 분노가 한꺼번에 끓어오른 것을 두고 FP는 "배고픔에는 종교가 없다"고 표현했다.


조선일보 A16면
3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