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코스피의 굴욕

입력 2019.12.09 03:16
미국 IT 기업 애플의 주가가 급등해 시가총액이 약 1400조원으로 불어났다. 한국 코스피 시장 전체의 시가총액 1384조원을 추월했다. 800개 가까운 우리 상장기업 주식 가치를 다 합쳐봤자 애플 한 회사만큼도 값을 안 쳐준다는 뜻이다. '굴욕'이란 말이 나온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주식 시장을 '미인대회'에 비유했다. 혁신 경쟁이 벌어지는 '4차 산업혁명 미인대회'에선 거대 IT 기업 하나의 몸값이 어지간한 나라 전체의 경제 규모보다 비싸게 매겨지고 있다. 세계 200여국 중 작년 GDP가 1조달러, 한국 돈 1200조원을 넘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16개뿐이다. 그런데 뉴욕 증시에선 기업 하나의 시가총액이 1조달러를 넘는 시대가 도래했다. 작년 8월 애플이 제일 먼저 테이프를 끊었고, 이어 아마존이 장중에 시총 1조달러를 넘었다. 올해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마존을 누르고 시총 2위에 오르면서 1조달러를 넘었다. 알파벳(구글 모회사)도 '1조달러 클럽'의 유력 후보다. 

▶세계적 투자가 워런 버핏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같은 집에 살면서 일주일에 세 번 맥도널드 치킨 너깃을 점심으로 먹는 사람이다. 보수적 취향만큼이나 투자 방식도 보수적이다. 1990년대 닷컴 열풍이 불 때도 기술주에 투자를 안 했다. 그런 버핏이 마음을 바꿔 3년 전 애플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그동안 아마존에 투자하지 않은 나는 바보였다"면서 아마존 주식도 샀다. 4차 산업혁명의 성장 동력을 신기루로 보지 않고 확신한다는 의미다.

▶작년 3월 말 코스피 시총이 1600조원을 웃돌 때 애플은 그 절반을 겨우 넘었다. 그 후 애플 주가는 쑥쑥 올라가 올해 들어서만 66% 상승했다. 반대로 코스피는 15% 가까이 쪼그라들었다. 반도체 거품이 꺼지고 대부분 기업의 실적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21거래일 동안 내리 한국 주식을 5조원어치 넘게 팔았다. 어떤 투자가가 경제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나라 주식을 사겠나.

▶주식 시장은 '꿈을 먹고 산다'고 한다. 미 증시에서 '1조달러 기업'이 속속 탄생하는 것도 투자가들이 지금 실적과 함께 미래의 성장성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증시의 주력이 4차 산업혁명의 미래형 산업군으로 채워지고 있지만 코스피는 여전히 제조업 중심이다. 코스피 시총이 애플에 역전당하던 날, '타다 금지법'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 그나마 있는 혁신의 싹마저 자르는 나라가 투자가들에게 꿈을 줄 수는 없다. 이대로면 코스피 시총은 애플에 이어 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 등에도 속속 따라잡힐 것이다.


조선일보 A38면
3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