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1% 예금 올인, 그 후

이경은 경제부 차장
입력 2019.12.09 03:13
이경은 경제부 차장
요즘 '예금 이자가 기막히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시중은행에는 1%대 예금이 대부분이고, 저축은행 같은 2금융권에 가봐도 연 2%가 고작이다.

이자가 사상 유례 없는 바닥 수준까지 떨어졌으니, 돈줄기는 방향을 틀어 다른 곳을 향해 흘러갈 법한데 현실에선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자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예금 잔액은 더 무섭게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주요 시중은행 5곳의 정기예금 잔액은 올 들어서만 73조원 가까이 늘었다. 만약 연말까지 급격한 자금 이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정기예금 잔액은 2017년 2분기 이후 11분기 연속 증가세를 보이게 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최장 기록이다.

리스크 있는 모험에 나서기보다는 은행에 현금을 쌓아두고 버티겠다는 트렌드는 점점 고착화되는 분위기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특히 10억원이 넘는 거액 예금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거액 예금주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주로 기업들이다. 10억원 초과 저축성 예금 잔액은 지난 6월 말 기준 594조원이었는데, 최근 1년 새 60조원이 늘었다. 2~3년 전만 해도 30조원 정도였는데, 현 정부 들어서 곱절로 늘어난 것이다.

경기 둔화 우려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상황이니, 안전한 예금으로 대피해 있겠다는 투자자들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고속 성장이 멈추면서 미래 먹거리 발굴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과감한 투자가 절실한 우리의 경제 생태계를 떠올린다면 이런 상황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초저금리 시대에 더 극성을 부리는 '예금 올인' 현상은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똑같이 나타났었다. 일본의 정기예금 이자는 지난 1993년 2.5%에서 1997년 0.5%까지 계속 떨어졌는데, 같은 기간 정기예금 규모는 오히려 1.5배 증가했다. 고령화·저출산으로 미래가 암울한데 주가는 내리고 물가마저 하락하니 불안하다면서 예금만 늘려간 것이다. 당시 일본 투자업계는 예금만 갖고서는 자산 증식이 어렵다며 '예금 바카(バカ·바보)'라는 자극적인 단어까지 써가며 호소했지만 예금 일변도의 자산 구조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알짜 투자처를 놓쳐버린 사람들도 많았다. 일본에서 23년간 예금만 했다면 최종 수익이 3.9%이지만, 같은 돈을 공모형 리츠(부동산투자신탁)로 굴렸다면 107% 수익을 거뒀을 것이란 조사도 나와 있다.

연초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었던 '노후 자금 2000만엔(약 2억2000만원)이 부족하다'는 내용의 정부 보고서는 이처럼 장기화된 예금 올인이 낳은 후유증이었다. 초저금리 시대의 예금은 무수익 자산이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미래 성장성이 높은 해외 시장에 투자하고, 예금 이자보다 높은 수익을 주는 리츠나 고배당주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바꿔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도 20년 뒤에는 일본보다 더 충격적인 숫자가 담긴 노후 손익계산서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A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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