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스포츠 금수저'는 땀으로 만들어진다

강호철 스포츠부장
입력 2019.12.09 03:15

스타 스포츠인의 아들·딸, 우월한 DNA 물려받지만 부모의 명성 커다란 짐
성공은 땀으로만 증명될 뿐

강호철 스포츠부장
지난주 열린 KT와 삼성의 국내 남자프로농구 경기에선 흥미로운 매치업이 관심을 끌었다. '농구대통령' 허재의 둘째인 허훈(KT)과 '황새' 김유택 농구 해설위원의 아들 김진영(삼성)이 대결을 펼쳤다. 이들이 아버지를 빼닮은 플레이로 코트를 휘젓는 모습은 1990년대 농구 전성기의 추억을 소환하기에 충분했다.

농구에는 2세 선수가 유독 많다. 허재와 김유택은 첫째 아들도 프로농구 선수다. 허재의 장남 허웅은 DB, 김유택의 첫째 최진수(부모 이혼 후 성을 바꿨다)는 오리온의 주축이다. 허재·김유택과 함께 '허동택' 트리오로 이름을 날렸던 가드 강동희의 두 아들은 중학 무대에서 꿈을 키우고 있다. 여자 프로농구 최고 센터인 박지수도 아버지가 프로 선수 출신이다. 다른 종목에도 '청출어람'을 노리는 2세가 많다. 최근 끝난 야구 국가대항전 '프리미어12'에서 매섭게 방망이를 돌리며 해외 스카우트들에게 예비 눈도장을 찍은 이정후는 '바람의 아들' 이종범, 내년 도쿄에서 사상 첫 올림픽 여자 체조 메달을 노리는 여서정은 '도마의 달인' 여홍철 경희대 교수의 피를 물려받았다.

사람들은 이들을 자연스럽게 '스포츠 금수저'라 부른다. 부모로부터 우월한 스포츠 DNA를 물려받은 데다 특별 개인 레슨까지 받을 테니 잘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가 성공을 100%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들은 운동 대물림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일반 선수들은 마주칠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마주 보고 서야 한다. 바로 부모들의 명성이다. 이들은 조금만 못해도 '누구 자식 맞나?' 같은 소리를 들으며 유전자마저 의심받는다. 그들이 받는 중압감은 일반인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정후는 친하게 지내던 야구인 2세가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우리, 아버지보다 더 유명해지기로 했잖아. 고충을 함께 나눌 친구가 없어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다'며 안타까워했다.

'성공한 2세'는 피가 아닌 땀으로 만들어진다. 또래보다 늦은 중2 때 농구를 시작한 허웅은 매일 새벽 체육관에서 수백 개의 슛을 던지면서 슛 감각을 키웠다. 8일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에서 75m 전광석화 드리블을 바탕으로 역대급 골을 만들어 낸 토트넘의 손흥민은 어렸을 때부터 하루 1000개 넘는 슛을 때리면서 페널티박스 좌우 모서리 지역에 상대가 알고도 못 막는다는 '손흥민 존'을 만들었다.

물론 부모들이 가만히 바라만 봤을 리는 없다. 허웅의 손을 잡고 매일 새벽 체육관으로 이끈 허재의 아내 이미수씨는 대회에 출전하는 아들들을 보살피러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손흥민이 득점 확률을 높이는 슛 자세를 만들고, 수비벽을 허무는 볼 궤적을 가다듬는 옆엔 '매의 눈'을 번득인 아버지 손웅정씨가 어김없이 있었다. 이종범의 아내 정정민씨는 어렸을 때부터 몰려드는 주위 관심에 아들이 교만해질까 봐 고교 때까지 외부 인터뷰를 모두 거절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나설 수 있는 것은. 일반 선수들과 기량을 겨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2세들 자신의 몫이었다. 스포츠는 밀실이 아니라 모두가 주목하는 운동장에서 기량을 겨룬다. 경쟁 과정에서 불공정 요소가 개입된 게 밝혀지면, 곧바로 퇴출이다.

현재 사회 각 분야가 불공정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학교 교직원이 딸 성적을 올리기 위해 시험문제를 사전 유출하는가 하면, 권력자·기득권층이 자기끼리 학맥·인맥을 만들어 평범한 자식들을 '엘리트'로 만드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스포츠 금수저'들이 땀으로 엮어낸 성공 스토리가 그래서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조선일보 A39면
3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