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코드형' 역사 전시

김태훈 논설위원·출판전문기자
입력 2019.12.07 03:16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야사에 관심도 많고 화제 삼기도 좋아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 놀이터가 '자은골'이라고 했는데, 그의 묘역 뒤 봉화산에 자은골이 있고, 마애불 같은 가야 유적이 있다. 그걸 잘 아는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한 달 뒤 청와대 회의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와 복원은 영·호남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고 했다. 얼마 안 있어 정부가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 100대 과제에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가 포함됐고, 관련 있는 지자체가 예산 따기 경쟁을 벌였다. 김해시는 가야 신화가 전해지는 구산동 구지봉 복원을 추진하면서 사업 부지 내 학교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학부모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올 6월 문화재청이 크게 선전했던 창원시 현동 유적 발굴도 논란이었다. 문화재청은 이곳에서 확인된 아라가야 무덤 670여기가 아라가야 고분군 중 최대 규모이며, 이 중 840호 고분은 아라가야 지역에서 조사된 것 중 가장 크다고 했다. 하지만 현동 고분군 면적은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20분의 1에 불과하며, 말이산엔 840호 고분보다 큰 무덤이 36기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엊그제 시작한 '가야본성―칼과 현' 특별전이 '가야사 복원'을 국정 과제로 제시한 정부에 코드를 맞추려다 너무 무리했다는 뒷말이 무성하다. 가야 건국 신화 장면을 새겼다는 지산동 고분군 흙방울은 학계로부터 "가락국 내용에 무리하게 짜맞춘 그림 해석"이라는 빈축을 샀다. 수로왕비 허황옥은 설화 속 인물인데도 '국제결혼' '다문화 가족의 시작' 같은 표현을 써가며 실재 인물처럼 설명했다. 한 원로 교수는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가야라고 앞다투는 형국인데 국립박물관이 이를 거르지 않고 향토사 수준의 전시를 했다"며 혀를 찼다.

▶단재 신채호는 삼국시대를 '열국쟁웅(列國爭雄)시대'라고 했다. 일부 가야사 학자들도 사국(四國)시대로 보자고 제안한다. 모두 가야사를 제대로 대접하자는 견해이고 타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가야사 복원은 여기에 정치적 고려가 들어 있다. 역사와 영·호남 벽 허물기가 무슨 상관인가.

▶정치적 필요에 의해 역사를 주무르는 '역사 정치'는 두고두고 폐해가 크다. 올 초 임시정부 100주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하려 했다가 북한이 임정을 싫어한다고 하자 슬그머니 묻어버린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가야사 복원은 필요하지만 정치가 앞장섰다 역효과를 부르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조선일보 A30면
3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