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를 닮은 농축된 맛… 씹어 넘기면 입안엔 바닷바람

정동현
입력 2019.12.07 03:00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굴 편
서울 낙원동 '호반'

서울 낙원동 '호반'의 서산강굴(앞)과 병어찜.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0년 전 영국 수퍼마켓에서 생굴을 샀다. 스코틀랜드산(産) 생굴은 하나에 1.5파운드 남짓이었다. 통학비 아끼려 자전거 타고 다니던 유학 시절 당시 한국 돈으로 굴 한 알에 3000원꼴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난 굴은 통영 것과 별 차이는 없었다. 단지 값이 비쌌을 뿐이다. 그 값 탓인지 굴 하나를 다룰 때도 신중했고 맛을 볼 때는 오감을 집중했다.

한국 굴이 싼 이유는 여럿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굴 양식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 첫째 이유다. 생산이 많으니 자연히 값은 싸진다. 여기에 아직까지는 저렴한 인건비로 굴을 까고 담는 이들의 노동력이 더해진다. 산더미같이 굴을 쌓아두고 장난감 같은 칼로 굴을 까는 아낙네들의 굽은 허리를 본 사람은 안다. 그 굴을 소중히 다루어 음식을 만들고 손님에게 내는 곳이 있다. 칼 같은 겨울바람을 이겨낸 맛을 담아낸 집들이다.

서울 명동 서울중앙우체국 뒷골목 '산동교자'는 좁은 주방에서 어깨 부딪혀가며 일하는 노(老)요리사 둘이 불을 튀기며 음식을 뽑아내는 곳이다. 다진 마늘 한 움큼 올려내는 알싸한 오향장육, 소금만으로도 충분한 맛을 내는 고기 튀김, 물기가 새지 않게 빠르게 볶아낸 부추 잡채 같은 요리도 좋다. 무엇보다 겨울이 되면 이 집 굴짬뽕 한 그릇 생각이 간절해진다. 굴 알을 살짝 부숴가며 볶는지라 국물 색이 살짝 거뭇하다. 그 탓인지 혀에 닿는 맛의 밀도가 묵직하다. 굴의 담백하고 시원한 풍미가 간간한 국물에 잔뜩 스며 있다. 그 공의 8할은 주름이 얼굴을 뒤덮은 요리사의 굵은 손아귀에 있다. 전장(戰場)에 나선 병사가 육탄전을 벌이듯 국자와 냄비를 쨍쨍 소리 나게 휘두르며 빨간 불과 하얀 증기에 맨몸으로 맞선다.

명동을 나서 청계천을 건너 종로에 가면 '열차집'이 있다. 미닫이문을 밀고 홀에 들어서면 비쩍 마른 사내가 주문을 받고 넣는데 그 모양새가 수산시장 경매사 같기도 하고 작전을 지시하는 농구팀 감독 같기도 하다. 재빠르고 정확한 주문에 탁자 위에 안착한 빈대떡 모음은 김치와 고기가 골고루 섞여 선택 장애를 원천 봉쇄한다. 상에 깔리는 어리굴젓을 빈대떡에 올려 먹는 것이 이 집 방법이다. 통통한 굴을 밀가루, 달걀물, 채소와 함께 부친 굴전도 피해 갈 수 없다. 노릇한 색에 먼저 식욕이 동한다. 돼지 비계 씹는 듯 부드럽고 고소한 굴이 씹히며 지릿한 금속성 맛과 희미한 오이 향기가 스친다.

종로3가 낙원상가 뒤편 낙원동에 가면 '호반'이 있다. 1961년부터 이어온 맛을 기억하는 오래된 사람들과 그 맛을 배우는 젊은이들이 섞여 매일 밤 떠들썩한 잔치를 벌인다. 호반에 가면 먼저 대창 순대와 병어찜을 시켜보자. 값비싼 병어 덕에 주인장 수지가 맞지 않는 병어찜은 매콤한 양념과 감자, 애호박, 두부가 큼지막하게 썰려 있다. 영어로 '버터피시(butterfish)'라고 부르는 병어의 하얀 살은 버터처럼 녹아내려 숟가락으로 먹어야 할 정도다. 야채와 고기를 다져 넣은 대창 순대는 맛에 빈틈이 없고 함께 나오는 간과 허파도 익힘이 적당해 퍽퍽하지 않다.

10월 말쯤 나와 4월 언저리에 들어가는 서산산(産) 강굴은 서해안 개펄 바위 틈에서 호미로 일일이 캔 녀석들이다. 그 때문에 양이 적어 아예 물건을 받지 못하는 날도 있다. 강에서 난 것이 아니라 '물이나 다른 게 섞이지 않은 굴 그 자체'란 뜻의 강굴은 알이 큰 남해 것과 다르게 씨알이 잘고 맛이 진하다. 이 굴을 숟가락으로 퍼서 입에 넣으면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농축된 맛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알을 씹어 넘기고 잠시 숨을 쉬면 목구멍 너머에서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그 맛에 이끌려 갯벌에 서서 작은 굴을 캤을 사람들이 떠오른다. 갈라진 손, 튼 입술, 거칠한 얼굴. 그러나 지지 않는다. 주저앉지 않는다. 이기고 이겨 하루를 난다. 작은 굴에 맺힌 옹골찬 맛이 겨울 바다 위 그들을 닮았다.
조선일보 B6면
3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