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세로 은퇴한 맥도날드 최고령 알바생 "침 뱉는 청년도 내가 공손히 말하면 미안해해"

이혜운 기자
입력 2019.12.07 03:00

[아무튼, 주말- 이혜운 기자의 살롱]
75~91세 아르바이트 근무 '영원한 현역' 임갑지氏

“어딘가 또 내가 할 일이 있지 않겠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잖아.” 지난 17년 동안 일한 맥도날드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은퇴한 91세 임갑지 할아버지는 앞으로 계획이 있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강북구 맥도날드 미아점에서 만난 임 할아버지는 몸이 곧고 눈은 반짝였으며 목소리는 실내 음악 소리를 밀어낼 만큼 컸다. 직원(아르바이트생) 모자를 손에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경기도 양주에서 서울 미아사거리까지는 대략 20㎞. 지하철 1호선 급행을 타고 4호선 창동역에서 환승하면 44분에 주파한다. 75세가 되던 2003년부터 17년간 이 지하철로 출퇴근했다.

체크무늬 콤비(재킷) 차림이었다. 농협에서 정년 퇴임하면서 당시 제일모직에서 기념으로 구입한 '좋은 녀석'이라고 했다. 36년째 입고 있는 재킷이다.

그를 만난 장소는 맥도날드 미아점. 한 달 전 은퇴했던 직장이다. 정확히는 네 번째 은퇴. 6·25 때는 직업군인이었고, 농협 은행원이었으며, 놀이공원 매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였고, 맥도날드 홀 아르바이트 직원이었다. 그사이 대통령은 이승만에서 문재인까지 12번 바뀌었다. 28년생, 91세 임갑지.

최고령 맥도날드 알바생

지난달 27일 오전 맥도날드 미아점에서 이 '영원한 현역'을 만났다. "마실 건 어떤 걸로 주문할까요?"라고 물으니 "난 시원한 콜라 한 잔"이라고 답했다. 기온은 영상 1도. 그는 2003년부터 한국 맥도날드 최고령 직원(아르바이트)으로 17년간 일하다 지난달 8일 은퇴했다.

―콜라를 좋아하시나요?

"콜라보다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더 좋아해. 버거 중에서는 치즈버거. 일할 때 점심은 할멈이 배추김치, 마늘장아찌로 도시락 싸줘서 그거 먹고, 햄버거는 집에 갈 때 포장해 가곤 했지."

―어떻게 70대 중반에 아르바이트할 생각을?

임갑지 할아버지가 맥도날드 미아점 직원(아르바이트)으로 일할 때 테이블을 닦는 모습. / 맥도날드
"그전에는 가게를 운영했어. 계약 기간 10년이 끝나고 6개월 정도 집에서 노는데 정말 지옥인 거야. 내가 가족이나 나라에 '기생충'이 된 것 같더라고. 그러다 길에서 '실버취업박람회'를 한다는 플래카드를 봤어. 인산인해더라고. 결혼식 주례 보는 일이 할 만하겠다 싶어 들어갔는데 나보다 더 나이 든 백발노인이 가득해. 이 노인들 일자리를 빼앗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돌아서는데 '맥도날드' 부스가 보이더라고."

―젊은 사람들 좋아하는 곳 아닌가요?

"내가 소학교(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경성(서울)으로 왔거든? 그때 종로 쪽에 빵집이 하나 있었어. 케이크를 먹으며 '나도 커서 이런 곳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때 생각이 난 거야. 지원서 앞·뒷면을 빼곡하게 썼어. '지금까지 살아온 내 과거가 여기에 다 담겨 있습니다. 열심히 할 테니 일 좀 시켜주시오.' 일주일 뒤 대답이 왔어. 나오라고."

―가족들 반응은요?

"할멈도 같이 박람회 가서 신청했거든? 그랬는데 일주일 뒤 나는 붙고 할멈은 떨어졌어. 할멈이 나보다 열한 살 어리거든. 못 믿겠다면서 내가 출근할 때 따라나온 거야. 맥도날드 직원이 할멈한테 '나오란 말 안 했는데 왜 나왔느냐'고 하니 '일하고 싶어 그런다'고 하더라고. 그걸 본 본사 직원이 의욕이 대단하시다며 추가로 합격시켰어. 자식들은 당연히 걱정했지. 건강에 무리가 된다며. 그런데 내가 그랬어. '사람이 일해야 한다. 이게 운동도 되고 정신적으로도 좋다'고."

―맡은 업무는요.

"한마디로 홀 서비스야. 테이블 정리하고, 쓰레기 치우고, 컵과 트레이 설거지하고. 시간 나면 매장 앞도 쓸고. 지하철역 주변 담배꽁초와 쓰레기도 줍고. 같이 교육받았던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분은 그만뒀어. 요조숙녀 같았거든. 그런 분은 이런 일 못 해."

―무례하게 굴거나 얄미운 손님은 없었나요?

"내가 화·목·일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3시까지 일했는데 그 시간대엔 내 또래 손님도 많아서 다들 친하게 지냈어. 조금 맘 상했던 건 젊은 친구 중에 그렇게 바닥에 침을 뱉는 친구들이 있어. 그래도 내가 가서 이러지 말라고 공손히 말하면 미안해하더라고."

―가장 힘드셨을 때는요?

"없었어. 나랑 같이 일했던 젊은 친구들이 힘들었지. 환절기 이럴 때는 체력적으로 조금 버겁기도 했지만."

―왜 매장 앞 지하철역 주변까지 치웠나요.

"그건 기본이라고 생각해. 자기가 있는 곳 주변이 깨끗해야지. 여긴 음식 다루는 곳인데 청결이 우선이지. 현관이 깨끗해야 손님이 기분이 좋지."

―17년 동안 한 번도 결근 지각이 없으셨다는데.

"나 혼자 일하는 게 아니잖아. 내가 결근하거나 지각하면 다른 직원들한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단 말이야. 그렇게 신경 써도 병원 날짜 이런 것 때문에 근무 날짜 바꿔야 할 때가 있어. 그럴 때 정말 미안했지. 손주뻘 동료들하고도 다 친했어. 다들 은퇴하면 자기들도 맥도날드에서 일하겠다고 그러고(웃음). 내 밑으로 60대 동료가 두 명이었어. 작년 구순 잔치도 맥도날드에서 해줬어. 카네이션도 달아주고."

“내가 백골 부대(당시 18보병연대) 출신이야. 우리 부대에는 월남한 사람이 많아서 반공엔 일인자였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다고 해서 백골이야. 난 군에서 모든 걸 배웠어.” 인터뷰 전 임갑지 할아버지가 내민 명함에는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경기도 양주시지회 고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아내와 같이 일하니 어떻던가요?

"처음엔 할멈은 혜화점, 난 미아점 이렇게 따로 일했어. 그러다 우리 매장에서 일하던 한 할매 직원이 그만두기에 본사에 '우리 할멈 여기로 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 그랬더니 처음엔 본사 직원이 '같이 계시면 오히려 싸우시는 거 아녀요?'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니 이 나이에 할멈이랑 싸울 것이 뭐 있어'라고 해서 같이 좀 일했지. 근데 할멈은 목 디스크가 와서 5년 만에 그만뒀어."

―양주에서 오는 40분 동안 지하철에서 뭘 했나요?

"신문 읽으면서 와. 내가 조선일보 50년 독자야."

―아르바이트 한 달 번 돈은요?

"60만원 정도? 컨디션이 더 좋을 땐 월요일도 일해서 더 많이 벌기도 했고. 그 돈으로 기부도 하고 손자 용돈도 주고. 첫 월급은 로터리클럽 소아마비 퇴치 운동에 기부했어. 내가 양주 로터리클럽 창립 멤버야. 1982년에 49명이 창립했는데 지금 5명 남았어. 내가 6대 회장이었어. 로터리클럽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돈만 있으면 안 돼. 직업이 있어야 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며 그 지역에 모범이 되는 사람이 돼야 해. '저 사람'이 아니라 '저분'으로 불리는 사람이어야 해."

―아르바이트한다고 했을 때 로터리클럽 동료 반응은요?

지난달 8일 서울 종로구 맥도날드 본사에서 열린 은퇴식에 임갑지 할아버지가 아내 최정례 할머니와 손을 잡고 참석했다. / 맥도날드
"다들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이 나이에 일한다는 게 존경스럽다'고 해주더라고. 사람은 태어나 철이 들면 평생 땀 흘려 일하게 돼 있어. 쉽게 말해 노동을 해야 소득이 생기는 거야. 피땀 흘려 얻은 소득이 자기 자산인 거야. 그 외의 것은 뿌리쳐야 해."

―스스로 깨달은 교훈인가요.

"우리 아버지가 이런 성격이었어. 아버지가 지금 이장, 옛날에는 구장(區長)이라고 그랬거든. 그때 구장의 권한이 막강했어.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 사람은 다 자기 할 일이 있다는 거야. 일을 해야 사람이라는 거지."

―일을 해야 사람이라면, 지금은 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셨나요(웃음).

"건강검진 결과가 잠깐 안 좋게 나왔는데 자식들이 너무 놀라며 말리더라고. 그런데 집에만 있으니 너무 심심해(웃음)."

백골 부대 상사

그는 1928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지금 북한 비행장이 있는 곳이다. 철도공사 인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해주에서 소학교를, 인천 옹진에서 중학교를 마쳤다. 할아버지 고향은 전라남도 나주. 나주 임씨라고 했다.

―언제 월남하셨나요.

"해주 살다가 16세 때 옹진으로 이사 왔어. 얼마 안 있다가 해방이 됐지. 38선이 그어지면서 집에 못 가게 됐어. 직선거리로는 얼마 안 되는데 말이야. 중학교 입학할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 아버지에게 '제가 일본 마쓰시타전기에 취직해서 학비 벌어오겠습니다'라고 하니 '가지 마라'고 하시더라고. 일본은 곧 불바다가 될 거고, 넌 일본군에게 끌려가게 될 거라고. 그때 아버지 말 거역했으면 지금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6·25도 참전하셨다고요.

"1949년 자원입대해 옹진 전투사령부 야전병으로 근무를 시작했어. 한번은 전투가 끝나고 보니 군복 대퇴부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있는 거야. 총알이 옷만 스치고 지나간 거지. 그때 미군 군복을 얻어 입었는데 체형에 맞지 않아 헐렁했거든. 그 구멍을 본 상사가 '넌 앞으로도 안 죽겠다. 총알이 바지만 뚫고 가다니'라고 하더라고. 종전 후 3년 더 복무하다 제대했어. 그때 내 최종 계급이 특임상사였어. 총 5번 특진했는데 의무대 위생병으로 나만큼 특진한 사람은 없었지."

―특별한 이유라도?

"21세에 사병으로 들어와 23세에 특무상사가 됐거든. 동료 상사들이 전부 의대, 약대 나왔지. 군에서는 최고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어. 난 중학교만 나왔는데. 한번은 임시 막사에서 천장 아래를 지나가는 전선이 불이 붙으려고 '지지직' 하는 거야. 내가 그걸 보고 놀라서 책상 위에 올라가 맨손으로 케이블을 끊어서 껐어. 생각하고 한 게 아니야.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한 거지. 상관이 '어떻게 장갑도 안 끼고 전선을 끊어서 불을 끄느냐. 이건 책임감 없으면 못하는 거다'며 특진시켰지. 난 군에서 모든 일을 배웠어."

―지금 세대는 전쟁을 모릅니다.

"한번은 나한테 '내가 겪은 6·25'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온 적이 있어. '나보다 경험 많고 훌륭한 사람이 많을 텐데…'라고 하니 와서 경험한 것만 이야기해 달래. 요즘 젊은이들이 6·25전쟁을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한다며. 이게 학교 교육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지. 내가 산증인인데. 6·25에 참전했고, 낙동강으로 후퇴했고, 다시 북진까지 한 내가 증인이야."

양주 농협 참사

1973년 그는 45세 나이로 농협에 입사했다. 옹진군이 수복 지역이라 제대하고 취업이 잘 안 돼 이런저런 일을 하다 겨우 구한 직장이라고 했다. 양주 농협이 처음 생겼을 때 조합장 밑 직책인 참사로 들어가 10년을 일했다. 정년은 55세, 1983년이었다.

―그때도 지각·결근을 안 했나요?

"지각·결근이 뭐야. 난 10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일요일 출근을 했어. 1년 동안 애들 얼굴을 한 열흘 봤을까.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일했으니까. 애들 일어나기 전에 출근하고, 자고 나면 퇴근했지. 그때가 박정희 정권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때야. 그때 우리나라는 쌀이 없어 굶어 죽곤 했어. 당시 박 대통령이 농림부에 '그럼 쌀이 얼마나 있어야 국민이 밥을 안 굶느냐'고 했더니 3800만석이라고 했대. 그래서 전국 농협에서 연 3800만석을 생산해라 지령을 내린 거야. 땅은 한정돼 있는데 그게 쉽나. 그때 농촌진흥청이 박사들 필리핀으로 보내 '통일벼' 개량해 온 거 아니야. 그런 일들 농림부에서 진행하면 일선 농협 직원들은 잠을 못 자. 3000만 목숨이 달린 거니깐 안 그렇겠어?"

―정년퇴직 후 생활은요?

"여전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 원서를 세 군데 냈는데 다 떨어졌지. 그래서 외국에 있는 친구들한테 편지를 썼어. 혹시 거기엔 나 같은 사람들이 일할 곳 있느냐고. 그랬더니 캐나다 친구에게 연락이 왔어. '좋진 않아도 일할 만한 자리가 있으니 오라'고 말이야. 그런데 거기서도 금방 취직이 되나. 교민 방송 출연하면서 이력서를 넣고 있는데 딸한테 전화가 온 거야. 딸이 놀이동산 '드림랜드(현재 북서울 꿈의 숲)' 직원이었거든? 거기서 2년 일하니 보상 차원으로 매장 운영권이 나왔다는 거야. 다시 돌아와 할멈이랑 가게를 10년 운영했지. 아이스크림도 팔고 과자도 팔고 하는. 일요일마다 사람이 가득했어. 그때 노후 대책을 마련했지."

―맥도날드 은퇴식 때 부부 사이가 매우 좋아 보이던걸요.

"중매로 만났는데 나보다 할멈이 열한 살 어려. 그래도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존댓말을 써. 나이 차가 어떻든 부부간에는 서로 예를 지키며 사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

―은퇴 후 하루 일과는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종일 신문을 읽어. 할멈이 그래. '왜 그렇게 신문을 보느냐'고. 그럼 내가 그래. '내가 이 나이에 어디서 공부를 하겠어. 학교에 가겠어? 책을 보겠어? 이게 다 교육이야. 신문에 얼마나 좋은 이야기가 많은데.' 내가 집에 신문 스크랩을 한 게 산더미야. 나중에 애들한테 줄려고. 그게 다 역사야."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일 자체를 시작하기가 어려운 환경이기도 합니다.

"그럼 알바라도 시작해. 여기서 돈을 번다고 생각하지 말고 배운다는 생각으로 일해. 일을 능동적으로 해. 사람이 사회 첫출발이 좋아야 해. 내가 일을 다 했는데 옆 사람은 바빠서 야단이다? 그럼 쉬지 말고 도와줘. 그게 협동 정신이야. 알바라도 매장에서 제일 일 잘한다고 인정받아봐. 그럼 소문이 나. 전국 맥도날드에서 가장 일 잘하는 알바다? 그럼 여기저기서 데리고 가려고 안 그러겠어? 모든 걸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해봐. 그럼 어딜 가도 환영받는 사람이 돼. 내가 일하면서 받은 감사패만 50개야."

처음에 그는 인터뷰를 사양했다. 평범한 사람을 왜 인터뷰하느냐는 것이었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함께 성장하던 선배들의 오르막 세대와 달리, 지금은 먹을 것 넘쳐나지만 성장이 멈춘 아니 내리막 시대. 젊은 세대는 '꼰대의 계몽'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90년 넘게 쉬지 않는 현역의 삶을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료를 위해 맨손으로 불붙은 전선을 끄고, 75세 나이로 맥도날드 알바를 지원하며, 시키지 않아도 매장 앞 지하철역 청소까지 자원하는 일꾼. '어딜 가도 환영받는 영원한 현역'이 거기 있었다.


조선일보 B1면
3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