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멋부리면 촌스럽다, 이것이 찰스 왕세자 옷태의 숨은 비결

최보윤 기자
입력 2019.12.03 03:00

[英 최고의 슈트 명가 앤더슨&셰퍼드]
찰스 왕세자·톰 포드·게리 쿠퍼… 세계적 유명 인사들도 단골
패션으로 英 왕실 인증까지 받아

기성복에 밀리며 위기 있었지만 '맞춤 정장' 문턱 낮추는 데 앞장

"너무 멋부리면(too dandy) 오히려 촌스러워요! 너무 완벽해 보이려 해도 개성을 잃고, 주렁주렁 액세서리로 치장하면 품격을 해치지요. 전설적 디자이너 하디 에이미스 경(卿)이 말씀하셨죠. 옷이 너의 일부가 돼야 하지, 네가 옷에 갇히면 안 된다고!"

서울 청담동 유니페어 매장에서 자신들이 재단한 슈트와 함께 포즈를 취한 앤더슨&셰퍼드 수석 재단사 리언 파월(왼쪽부터), 앤다 롤런드 CEO, 재단사 샘 래본.이미지 크게보기
서울 청담동 유니페어 매장에서 자신들이 재단한 슈트와 함께 포즈를 취한 앤더슨&셰퍼드 수석 재단사 리언 파월(왼쪽부터), 앤다 롤런드 CEO, 재단사 샘 래본. 이들은 "맞춤 옷은 마치 미용실에서 마음에 딱 맞는 헤어디자이너를 만나는 것처럼 서로 신뢰가 필요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멋쟁이(Dandy)'란 말이 탄생한 곳이 영국인데, 패션으로 영국 왕실 인증까지 받은 이 영국인들은 너무 꾸미지 말라고 조언한다. 영국 맞춤 슈트 거리 새빌 로(savile row)를 대표하는 '앤더슨&셰퍼드'의 CEO 앤다 롤런드와 수석 재단사 리언 파월, 재단사 샘 래본이다. 최근 국내 남성복 전문 편집숍 유니페어와 손잡고 처음으로 트렁크쇼(소수 고객을 위한 맞춤 서비스)를 선보인 이들은 "멋쟁이는 연출하지 않는 연출, 즉 자연스러움을 몸에 익히고 교양을 갖추는 데서 출발한다"고 강조했다. 대표적 멋쟁이로 예를 든 건 앤더슨&셰퍼드의 30년 단골인 영국 찰스 왕세자. 찰스 부부가 사는 클래런스 하우스로 직접 가서 옷을 맞춰준다는 수석 재단사 파월은 "좋은 옷을 알아보기도 하지만, 그걸 잘 보존해 수선해서 입는다"고 말했다. 2005년 커밀라와 결혼식 때 슈트는 13년 전 옷을 수선해 입었고, 해리 왕자 결혼식에서 입은 옷 역시 30년 전 재킷을 고쳐 입었다. 앤더슨&셰퍼드 측에선 수선을 위한 옷감을 모두 보존하고 있다고 했다.

2005년 자신의 결혼식에서 13년 전 맞췄던 앤더슨&셰퍼드 의상을 수선해 입은 찰스 왕세자와 커밀라 왕세자빈. /앤더슨&셰퍼드
1906년 창립된 앤더슨&셰퍼드는 군대 제복에서 영감을 받아 딱딱한 여느 영국 맞춤복들과 달리 부드럽고 유연한 재단으로 명성을 얻었다. 어깨와 겨드랑이 부분에 여유를 둬 몸을 편하게 한 덕분에 1920~1930년대 할리우드·브로드웨이 배우들에게 인기였다. 찰리 채플린, 게리 쿠퍼, 케리 그랜트 등 할리우드 황금기를 풍미했던 이들이 모두 충성 고객이었다.

캘빈 클라인, 마놀로 블라닉, 톰 포드 등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들도 단골이다. 톰 포드는 앤더슨&셰퍼드 의상을 가리켜 "세계 최고의 맞춤복"이라고 칭한 바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이 열여섯에 숙련공으로 처음 재단을 배운 곳도 앤더슨&셰퍼드다. 그를 사로잡은 건 꼼꼼한 공정이었다. 27회의 사이즈 측정이 끝난 뒤, 사진을 수십 장 찍어 2D 평면을 입체적 3D로 변환해 수개월 이상 작업한다. 재단사를 영국에선 '커터(cutter)'라고 하는데, 총괄·코트·바지 커터 등 스태프 18명과 50명의 테일러가 일하고 있다.

최고의 슈트 명가라고 하지만 기성복이 인기를 끌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전통을 이어야 한다'며 1970년대 말 경영권을 인수한 억만장자 롤랜드 롤런드가 돈을 퍼부으면서 되살아났지만 그의 사망 후 다시 내리막길을 가기 시작했다. 맏딸 앤다 롤런드는 "2004년 대표 자리에 올랐을 땐 홈페이지조차 없었다"며 "온라인 몰을 개설하고,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며 장인정신의 위대함을 널리 알렸다"고 했다. 간판만 보고 주눅이 들어 발길을 돌리는 이들을 위해 니트와 넥타이 등을 파는 가게도 열었다. '수작업의 위대함'을 느낀 젊은이들의 '취업 이력서'가 밀려들었다.

'맞춤의 50%는 고객 몫'이라는 이들이지만 정석은 있다. "기본은 단연 네이비 블루 슈트지요. 여러 가지 맞춰 입기도 쉽고요. 검은 슈트에 브라운 슈즈는 절대 권하지 않습니다. 요즘 인기라면 체크 트위드 코트와 코듀로이(코르덴) 재킷을 추천 드려요. 코듀로이를 찾는 고객들이 늘고 있지요. 내년을 위해서라면, 배우 케리 그랜트가 즐겨 입던 핀스트라이프(줄무늬) 슈트가 좋겠네요. 유행은 돌고 돌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니까요."


[꽉 끼는 바지는 꼴불견… 짧은 길이 재킷은 피하라]

/앤더슨&셰퍼드
앤더슨&셰퍼드의 장인들이 꼽은 최악의 '꼴불견 패션'은 짤막한 재킷. 리언 파월 수석 재단사는 "짧고 꼭 맞는 스타일이 유행하긴 했지만 클래식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며 "엉덩이를 적당히 덮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배가 나왔을 때는 뒤 절개선 트임(center vent)을 좀 더 길게 하거나 뒤에 트임 두 개를 내서 호흡하기 편하게 할 수 있지요. 다리가 짧을 때는 밑위(허리에서 사타구니까지)를 길게 하고, 밑단 접기(카브라)를 없애야 합니다." 조끼를 꼭 구매할 필요는 없지만 스리피스〈사진〉로 입으면 격식 있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요즘엔 비즈니스 슈트 외에도 분홍색 코듀로이 재킷, 벨벳으로 된 스모킹 재킷(파자마와 턱시도를 섞은 느낌), 화이트 타이(연미복) 등을 찾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 중요한 건 핏(fit)! 롤런드 CEO는 "핏 된다는 건 꽉 낀다는 말이 아니다. 도배한 듯 입으면 실례"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A22면
트래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