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이 정권에도 '언더' 조직이 있는가

황대진 정치부 차장
입력 2019.12.03 03:15

운동권은 '언더'가 실세
靑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 드러나지 않은 배후 있다면 얼굴 내놓고 권력 행사해야

황대진 정치부 차장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 사건을 보면서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가 떠올랐다.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이 금융위 재직 시절 비리 의혹이 드러나자 당시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은 휴대전화 포렌식을 포함한 강도 높은 감찰을 지시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감찰은 중단됐다. 유 전 부시장은 이후 더불어민주당 전문위원, 부산시 부시장으로 영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천경득 총무비서관실 선임행정관 등이 감찰 중단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던 조 전 수석이 자기 밑의 비서관과 옆 사무실 행정관의 말 한마디에 지시를 거둬들였을 것 같지는 않다.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은 조 전 수석이 감찰 도중 '여러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유 전 부시장은 천 행정관 외에도 김경수 경남지사,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등과 여러 차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민주당 전문위원으로 활동할 때는 민주당 관계자들에게 "호철이 형 잘 아느냐"며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의 친분도 과시했다고 한다.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누가, '천하의 조국'마저 '껍데기'로 만들었나.

1980년대 대학 운동권에는 '언더(under)' 조직이 있었다. 말 그대로 지하에서 활동하며 학생 운동권을 실제로 움직였다. '언더'에서 운동 방향을 정하고 투쟁 방침을 세우면 전대협이나 각 학교 총학생회 등 전위 조직이 이를 수행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김경수 지사도 서울대 운동권에서 '언더'에 속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고려대의 대표적 '언더'였다. '언더'들은 전대협을 만들고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80년대 '언더'들은 노무현·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차례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앞서 언급한 사람들도 대부분 공직을 맡거나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유재수 사건을 보면 이 정권에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언더' 조직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여권 내부에선 "이 사람은 부산 실세 누구의 사람, 저 자리는 누가 맡아놓은 자리" 등의 말이 나온다. 이런 상황을 빗대 대안신당 박지원 의원은 "북한은 우리 민족끼리, 남한은 우리 식구끼리"라고 했다. 요즘 여권은 같은 식구라도 아랫목과 윗목 차지가 따로 있는 것 같다.

신동엽은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했다. 껍데기는 알맹이를 위해 존재한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알맹이를 보호한다. 알맹이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도 있다. 일본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이 강경화 장관을 '장식품'에 비유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있었다.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치욕스러운 보도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강 장관뿐 아니라 현 정부 장관 상당수가 지위만 있고 권한은 없는 '껍데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알맹이들은 어딘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행사 주체와 방법이 명확히 기술되어 있다. '언더'나 비선 실세는 이를 행사할 권한이 없다. 오히려 법이 규정한 권력은 껍데기들에게 있다. 드러나지 않은 알맹이들이 권력을 행사하면 그게 권력 사유화고 국정 농단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미 경험한 일이다.

이 정권에 최순실 같은 '언더 알맹이'가 없기를 바란다. 만약 있다면 당당히 나와서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공직을 맡길 바란다.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법이 부여한 권한을 정당하게 행사하라. 그리고 스스로 실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게 법치국가다.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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