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反中 차이잉원 낙선 공작"… 대만, 발칵 뒤집혀

배준용 기자
입력 2019.12.02 03:00

호주 망명 신청 中스파이 폭로
"작년 11월 지방선거부터 개입… 親中 후보에 정치자금 지원… 온라인 부대 조직적 운영"

대만 정부, 대대적 수사 착수
국민당 "빨갱이 낙인" 반발

차이잉원(왼쪽), 왕리창
내년 1월 11일 대선을 앞둔 대만이 최근 호주에 망명을 신청한 중국인 왕리창(王立强)의 폭로로 발칵 뒤집혔다. 왕씨가 호주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중국 정부의 스파이였다고 주장하며 "중국 첩보 당국이 반중(反中) 성향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재선을 막으려고 지난해 11월 지방선거부터 이번 대선까지 조직적 선거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왕씨는 지난달 24일 호주 탐사보도 매체 '60미니츠(60Minutes)' 인터뷰에서 그가 홍콩에 있는 중국계 투자회사 '중국창신투자유한공사'로 위장한 중국 첩보 기관에서 스파이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자신의 임무는 홍콩 내 독립운동을 저지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2015년 반중 서적을 판매하던 홍콩 '코즈웨이베이서점'의 리보(李波) 대표와 직원 등 5명이 실종된 사건에 연루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중국창신투자유한공사 대표로 알려진 중국군 고위 관계자 샹신(向心)의 지시를 받아 대원 6명을 지휘해 리보와 직원들을 중국 본토로 납치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모든 신상 정보를 바꾸고 위조 여권으로 대만에 잠입했다. 거기서 지역 언론과 시민단체를 매수하고 '온라인 공작 부대'를 꾸려 중국에 우호적이거나 차이 총통을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했다. 친중 성향 후보에게 기부 형태로 정치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왕씨는 "지난해 11월 가오슝(高雄)시 시장 선거에 국민당 후보로 출마한 한궈위(韓國瑜)에게 중국 첩보 기관이 2000만위안(약 34억원)을 선거 자금으로 줬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궈위는 중국과 관계 개선을 주장해 인기를 끌었고, 민진당의 텃밭인 가오슝에서 20년 만에 처음 국민당 후보로 시장에 당선됐다. 단박에 거물급 정치인으로 떠오른 그는 여세를 몰아 지난 7월 국민당 경선에서 궈타이밍(郭台銘) 전 폭스콘 회장을 제치고 대선 후보로 낙점됐다.

왕씨는 지난 5월 아내와 아이가 살고 있는 호주로 입국해 중국 첩보 요원들의 미행을 피해 다니다 최근 호주 정부에 신변 보호와 망명을 신청했다.

홍콩 사태의 여파로 최근 지지율이 급락 중인 한궈위 후보는 왕씨의 폭로로 절벽에 내몰린 양상이다. 한 후보는 "내가 중국 돈을 단 1원이라도 받은 증거가 나오면 대선 후보에서 사퇴하겠다"며 결백을 호소하고 있다. 반면 반중 여론 덕에 인기가 급상승 중인 차이 총통은 '왕리창 스캔들'에 대대적 수사를 지시하며 대선 승리를 굳히는 분위기다.

대만 정부는 왕씨의 폭로가 나온 지난달 24일부터 대대적 수사에 착수했다. 마침 병 치료를 이유로 대만에 입국해 있던 중국창신투자유한공사 대표 샹신과 그의 아내를 공항에서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대만 법무부도 "지난해 지방선거 때 국민당에 외부 자금이 유입된 사실을 이미 확인했으며, 호주 당국에서 관련 정보를 넘겨받아 공조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외교 전문지 더 디플로맷에 따르면 대만 식료품 기업 '완트-완트(Want-Want)'와 완트-완트가 소유한 뉴스채널 'CTV'와 'CTi-TV'도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의 자금을 받고 지난해 지방선거부터 최근까지 한궈위에게 유리한 기사를 보도하고 차이잉원 정권을 비난하는 기사를 쓴 혐의를 받고 있다. 지방선거 당시 완트-완트 소유 언론들은 한궈위에게 우호적 기사를 남발하고 한 후보와 경쟁하던 천치마이(陳其邁) 민진당 후보에 관한 허위 비방 기사를 다수 보도한 것이 드러나 대만 국가통신위원회(NCC)가 완트-완트에 과태료를 부과하기도 했다.

대만 정부의 수사와 민진당의 공세에 국민당은 "우리를 빨갱이로 낙인찍으려는 정치 공세가 펼쳐지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파문이 커지자 중국 정부도 반박에 나섰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지난달 27일 "중국의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왕리창은 사실 사기꾼에 불과하다"며 '과거 왕리창이 사기 혐의로 중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이라는 2분 30초짜리 동영상을 공개했다. '사기꾼인 왕씨가 호주에 머물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그의 폭로를 평가절하한 것이다.

하지만 60미니츠의 의뢰로 왕씨의 증언을 검증한 대(對)중국 첩보 전문가 필립 그레고리는 "왕씨의 폭로는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있으며, 죽음을 각오한 청년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볼 수 있다"고 평했다.


조선일보 A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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