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윤 기자의 혼자 보긴 아까워] 못 넘을 벽이라면, 틈새라도 뚫는다

황지윤 기자
입력 2019.12.02 03:00

영화 '야구소녀'

프로야구 선수를 뽑는 선발경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남자들 코를 납작하게 했던 주인공 수인(이주영)은 뜻밖의 상황을 마주한다. "여자인 게 단점이 아니다"라며 당장에라도 입단시켜줄 것처럼 굽실거리던 구단 대표가 내민 계약서에는 '선수'라는 말 대신 '여성 야구 부서'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선수로 시험을 봤지만, 느닷없이 운영 부서에 오라는 제안을 받자 수인은 화가 치민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말한다. "저는 볼 회전력이 좋아요. 다른 선수들보다 힘이 약해서 구속은 느리지만 그래도 이길 수 있어요. 그게 제 장점이에요."

이달 6일까지 열리는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의 화제작 '야구소녀'(감독 최윤태)의 한 장면이다. 수인이 자신을 긍정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본래 주특기는 직구. 구속 130㎞를 던져 '여자치곤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 중학교 시절 '천재 야구소녀'로 불렸고 각종 대회 상을 휩쓸었다. 남자들만 들어간다던 고교 야구부에 간신히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버텼지만, 야구만 보고 살아온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갈 곳이 없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로 분류됐다. 1996년 규약에서 이 문구가 빠지면서 여자도 뛸 수 있게 됐지만, 사실상 프로에서 뛰는 여자 선수는 없다.

한때 '천재 야구 소녀'로 불렸던 수인(이주영)은 고등학교 졸업 후 갈 곳이 없다. /서울독립영화제
자기보다 뒤처졌던 친구 정호가 프로 구단 입단 제안서를 받는 걸 보고 수인은 마음이 착잡하다. 엄마는 "안 되는 거면 빨리 포기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괜한 오기로 그렇게 싸우면서 살 필요 없다"며 현실의 벽을 받아들이라고, 그냥 남들처럼 수긍하고 살라고 말한다. 그래서 수인이 택한 게 '너클볼'이다. 손가락을 구부린 채 쥐고 던져서 공이 거의 회전하지 않는 느린 변화구다. 예측이 어려워 타자가 치기 어렵다. 못 넘을 벽이라면, 틈이라도 뚫어내는 게 수인의 전략이자 그가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비법이다. '느리다'며 '맨스플레인'하는 선수들에게 그는 말한다. "빠르게 안 던져도 되는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섹션에서 처음 공개된 후 평단과 영화 팬들 사이 두루 호평을 받는 주목할 만한 한국 독립영화다. 이미 3회 차 상영이 전석 매진됐을 만큼 반응이 뜨겁다. 내일 마지막 상영을 앞두고 있다.


조선일보 A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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