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토막 같던 연주, 바람에 날리는 풀꽃처럼 바꾸고 싶었죠

김경은 기자
입력 2019.12.02 03:00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 마시모 자네티]
지휘 거장 아바도의 마지막 조수…
취임 1년만에 악단 색깔 바꿔 호평… 단원들 연주 달라진 비결은 '웃음'

지난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 '모차르트 마법'에 빠졌다. 마법사는 이탈리아 지휘자 마시모 자네티(57). 지난해 9월부터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맡은 그는 나흘간 경기필과 함께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를 지휘하며 재능과 경험을 맘껏 뽐냈다. 공연은 빈틈 많은 연출로 아쉬움을 남겼지만 음악을 책임진 자네티와 경기필의 호흡은 눈부셨다. 밀라노 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작곡, 지휘를 배우고 정상급 극장인 독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20년 가까이 오페라 지휘로 잔뼈가 굵은 자네티의 내공이 빛난 순간이었다.

마시모 자네티가 예고 없이 달려든 카메라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지 크게보기
마시모 자네티가 예고 없이 달려든 카메라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음악에서는 소리만큼 침묵이 중요하다"며 "말할 때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잠깐 멈추는 것처럼 음악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진한 기자
'딱딱한 나무토막 같던 경기필에 새 숨을 불어넣으며 그들의 연주를 부드러운 양탄자에 태웠다'는 호평을 듣는 자네티를 지난 26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1997년 창단한 경기필은 2016년 명지휘자 리카르도 무티와 두 차례 공연하며 '지휘자 요구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오케스트라'라는 평을 받은 악단. 지난 4월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선 자네티와 함께 프랑스 음악과 독일 음악을 제대로 선보여 팬들을 기쁘게 했다. 취임 1년 만에 악단의 색깔을 바꾸고 나아가 단원들한테서 존경심까지 얻은 비결이 뭘까. 그의 답은 "웃음"이었다.

경기필과 첫 리허설을 할 때다. 단원들이 기교는 좋은데, 사운드에 도통 웃음기가 없었다. 실제로 눈과 입이 웃지 않았다. "무조건 '하하!' 웃으란 말이 아니에요. 제 눈이 웃고 있으면 상대방은 자신이 이 장소에 잘 와 있다, 무엇이든 쉽게 할 수 있겠구나 안심한다는 거죠." 그는 "연주는 반드시 육체적 움직임을 동반한다"고도 했다. "베를린 필과 빈 필은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움직여요. 마음에 무얼 담고 있는지에 따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게 음악이니까." 자네티는 "그래서 지난 1년간 단원들이 편안하게 감정을 표출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며 "이제 단원들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생각을 읽어내 연주법을 바꾼다"며 뿌듯해했다.

경기필이 유럽에 덜 알려진 신생 악단임에도 지휘자 무티가 객원 지휘를 두 번이나 해줬다는 점이 그를 사로잡았다고 했다. 지휘 거장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의 마지막 조수였으니, 스스로를 '행운아'라고도 했다. "여섯 살 때 베토벤 교향곡 3번을 지휘하는 그를 보고 온몸이 마비됐어요. 그날 결심했죠, 지휘자가 되겠다고." 한창 지휘 경력을 쌓아갈 무렵 아바도한테서 "같이 일하자"며 전화가 왔다. "평생 기다려온 순간이었어요." 아바도가 수술을 받고 가장 아파했던 삶의 마지막 3년을 함께했다. "모든 리허설을 따라다녔고, 무엇이든 물어봤죠. 그는 고통스러울 때에도 선승(禪僧)처럼 부드럽게 상황을 제어했어요. 내 지휘는 그에게서 왔죠."

경기필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지난 10년간 경기필이 한 연주를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3년 안에 베토벤이 남긴 아홉 개 교향곡 전부를 경기필과 한 주에 다 하겠다"고 밝혔다. "베토벤을 잘 알고 잘 표현하는 건 최고봉에 오르길 원하는 악단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길. 기본이 중요하죠. 잘 먹여서 몸의 일부로 만들려고요."

당장 내년 3월부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과 브람스 교향곡을 같이 선보일 계획이다. "브람스가 일견 투박해 보여도 현은 굉장히 투명하게 표현해요. 모차르트와 닮았죠." 그는 "경기필과 함께하면서 태도가 많은 걸 얻게 해준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가족끼리도 다툴 때 있잖아요. 하지만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면 못 풀 게 없단 걸 여기 와서 절감했어요. 신나게 웃는 경기필을 만들고 싶습니다."


조선일보 A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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