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91] 나의 본적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입력 2019.12.02 03:12

나의 본적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김종삼(1921~1984)

벌써 '가을'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가을 다음에는 '늦가을'이 옵니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틀어놓으면 '늦가을'이 사방으로 울려 퍼집니다. 김종삼은 그 누구보다도 음악의 시인이었으니 그를 불러 함께합니다.

늦가을 볕이 아주 식어버리지는 않아서 아직 언덕 아래는 따스합니다. 발목 아래에 낙엽들이 구릅니다. 낙엽 위에 내린 '햇볕' 한 자락, 그것이 내가 이 땅에 적을 두고 산 시간의 길이었고 이력의 전부였습니다. 밟으면 그만 가루가 되고 말 무엇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본적'을 찾아봅니다. 한때는 '거대한 계곡'이기도 했으나 그대로 '잎새'로 응축됩니다. 꿈꾸던 사랑의 '맑은 거울'이고 싶었으나 그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작은 마을의 작은 '교회당 한 모퉁이'에 이르렀습니다. 세상 가장 낮은 자리의 '짚신'이었다가 마침내 '맨발'이고 말 것을 바라봅니다. 허나 누군가의 맨발을 가려주던 '짚신'이었다면 그대로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삶인 것도 압니다.


조선일보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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