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대신 책으로 가르쳤던 싱글맘… 그집 딸이 겨울왕국 만들었어요

남정미 기자
입력 2019.11.30 03:00

[아무튼, 주말] [남정미 기자의 정말] 겨울왕국1·2 감독 겸 작가제니퍼 리 디즈니 CCO

괴롭힘 당할 때마다 모험담 상상 - 안나처럼 나만의 이야기에 몰두
머리도 안 빗고 옷엔 얼룩 묻어있고… 완벽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사람들 위로하는 얘기 쓰겠다 다짐 - 역경 속 인내하는 신데렐라 좋아해
언니는 책임감 강한 엘사 같은 존재… 나는 반대로 야생마 같은 안나

학창 시절 당한 괴롭힘은 나중에 창작의 토대가 됐다. 학업 중 태어난 아이는 글을 번개같이 빨리 쓸 수 있는 동력이 됐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작가라서 그럴까. 영화 ‘겨울왕국’ 시리즈 감독 겸 작가인 제니퍼 리는 상처나 고난마저 궁극적으로 좋은 경험으로 바꿀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학창 시절, 매일같이 다른 아이들이 놀렸습니다. 그때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는 신데렐라를 보며 견뎠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신데렐라가 나를 위로한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이야기를 쓸 거야.'"

그는 30여년 전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그것도 전 세계 가장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건넨 이야기로. 전 세계 역대 최고 흥행 애니메이션인 '겨울왕국1'이 그의 작품이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첫 여성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Chief Creative Officer). 디즈니는 2006년 픽사를 인수하면서, 공동 회장 아래 디즈니와 픽사 각각 1명씩 CCO를 두고 있다. 그중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이끄는 사람이 바로 놀림받았던 소녀. 겨울왕국1·2의 감독 겸 작가 제니퍼 리(48)다.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제니퍼 리를 만났다. 신데렐라가 유리 구두를 신고 한 방에 신분 상승한 얘기를 예상했는데, 그녀는 동화의 무대 뒤 이야기를 들고나왔다.

신데렐라

2014년 5월, 모교 뉴햄프셔 대학 졸업식 연설장. 겨울왕국으로 한창 흥행 가도를 달리던 그녀가 축하 연설의 영예를 얻었다. '겨울왕국1'으로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연단에 선 그녀는 어린 시절 당한 괴롭힘에 대해 말했다.

―어릴 때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요.

"어릴 적 저는 매우 창의적인 아이였다고 생각해요. 저만의 이야기에 몰두했습니다. 겨울왕국의 안나처럼요. 그러면서 어수선하고,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고, 머리도 제대로 안 빗고 다닐 때도 있었어요. 이런 모습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놀림거리가 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지고, 어머니는 두 딸과 로드 아일랜드주(州) 이스트 프로비던스로 이사했다. 동네는 부자였지만 제니퍼네 집은 가난했다. 머리는 엉켜 있고, 옷에는 늘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이들은 그녀를 밀치면서 지나다녔다. 중학교에 입학하며 시작된 괴롭힘은 3년 내내 이어졌다.

―어떻게 극복했나요.

"엄청난 모험담을 혼자 상상했습니다. 정의가 승리하고, 온갖 역경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들이 있는 모험담을요. 디즈니 만화, 특히 신데렐라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힘들 때면 매일같이 신데렐라를 보며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성장통을 겪는 이야기, 남과 달라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야기, 두려움에 맞서는 이야기…. 이 이야기들이 제가 힘들 때 힘이 돼 줬습니다. 나도 이렇게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처가 창작의 토대가 된 셈이군요.

"괴롭힘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 내면의 힘을 일깨워서 견뎌내는 것 등은 겨울왕국 안나 캐릭터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 경험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리(Lee)라는 그녀의 성씨는 한국에서 종종 한국계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는다. 그녀는 미국인. 리는 그녀가 24세 때, 어머니의 처녀 적 성을 따서 바꾼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의 의미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어머니입니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어머니가 딸 둘을 혼자 키우셨습니다. 간호사셨는데, 생계 때문에 종종 투잡도 뛰셨죠. 그럼에도 저희를 위해서 안정된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셨습니다. 돈은 많이 없었지만, 집은 항상 책으로 가득했습니다.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저희에게 심어주셨고,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양육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싱글맘으로서 그렇게 해낸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믿음대로 두 자녀는 모두 대학원까지 마쳤다. 언니인 에이미는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영어 교사로 일한다. 그녀는 뉴햄프셔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 컬럼비아대학교 예술대학원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무척 공평하고 엄하셨지만, 또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믿어주셨습니다."

지금의 기준대로라면 어릴 적 그녀는 ADHD 판정을 받았을 것이라고 종종 말한다. 그러나 간호사이기도 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약물치료 대신 댄스 수업을 받게 했다. 그녀는 '어머니는 내가 단지 할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겨울왕국은 자매애가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제게는 언니가 엘사(겨울왕국 주인공) 같은 존재입니다. 책임감도 강하고, 모범생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훌륭한 본보기였습니다. 반대로 저는 야생마 같은 안나(엘사의 동생)였습니다. 성격은 정반대였어요. 언니가 저를 지켜줬습니다."

제니퍼 리 감독이 '겨울왕국2' 개봉에 맞춰 한국을 찾았다. "제작진처럼 주인공들을 아껴주는 한국팬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 김치 담그기 체험을 한 그녀는 "원래 매운맛을 좋아해 맛있게 먹었다"고 했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다른 제작진도 경험 이야기를 하나요?

"각본팀 모두가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제작할 때 12~15명이 한 팀으로 움직이는데, 자신의 인생 경험과 가족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크리스 벅(겨울왕국 공동 감독)은 대가족이고, 우리 가족은 작은 편이죠. 그렇지만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겨울왕국은 디즈니의 전형적 동화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제가 겨울왕국 팀에 합류하기 전부터 크리스는 진정한 사랑이 꼭 남녀 간의 로맨틱한 사랑이거나, 입맞춤 혹은 왕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도 매우 강력하다는 거죠. 이 말이 겨울왕국에 합류한 계기가 됐습니다. 겨울왕국은 캐릭터들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용감할 때도, 두려워할 때도 있죠. 그런 불완전한 캐릭터가 장애물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이 진정성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신데렐라를 좋아하나요.

"디즈니 영화 중 가장 좋아합니다. 제 사무실 책상 앞에도 신데렐라 그림을 붙여 놓았습니다. 매일 이 그림을 보며 신데렐라는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인내하고, 자신다운 삶을 살고, 선한 사람이라는 점을 되새깁니다."

엄마 작가

시나리오 작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뉴욕의 랜덤 하우스 출판사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30세가 되던 해,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예술대학원 진학을 선언했다. 전공은 영화학.

―커리어 전환의 계기는 무엇인가요.

"책에 대한 애정으로 출판계로 진로를 잡았습니다. 매일 책에 둘러싸여 있을 수 있고, 무료로 책을 볼 수 있으니까요. 소설이나 시를 쓰기도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이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사람의 대화를 듣고선, 이를 영화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써봤는데 계속 그다음이 써지는 겁니다. 두 달 만에 영화 시나리오 한 편이 완성됐습니다. 내가 찾던 것이란 느낌이 왔습니다."

느낌은 적중했다. 대학원 재학 중 점점 시나리오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더니, 첫 장편 시나리오 '힌지드 온 스타스'는 컬럼비아대학교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 무렵, 딸 애거사도 태어났다.

―대학원에 다니며 아이를 낳았습니다.

"다들 아이가 태어날 때 '액션!'이라고 외치며 태어날 거라고 농담했습니다. 아이 덕분에 번개같이 글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이가 낮잠 잘 때 얼른 써야 하니까요. 단 몇 분도 너무 소중했습니다. 디즈니에선 서로 이런 농담을 합니다. '우리가 엄마라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이 되는 거야.' 그런데 저는 이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 안 해요. 영화 제작자의 삶에 '엄마'가 다른 에너지를 주고, 일상을 느슨하게 하지 않는 거죠."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원 동기이자 디즈니에서 근무하던 필 존스턴과 인연으로 2011년 3월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입사했다. '주먹왕 랄프'의 공동 각본을 맡았다. 이후 입사 7년 만에 디즈니 사상 첫 여성 CCO가 됐다. 디즈니 사상 최초 여성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 여성 감독 최초 박스오피스 매출 10억달러 돌파, 작가 출신 최초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감독도 그녀가 달고 다니는 타이틀이다.

―최초 타이틀이 많습니다.

"미국 LA, 특히 할리우드의 분위기는 뉴욕 출판계와 전혀 달랐습니다. 출판업이나 미 동부 쪽은 어느 정도 일에서 (남녀의) 권력 균형이 잡혀 있는 편인데, LA로 오니 여성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종종 소외되더군요. 디즈니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 할리우드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굉장히 놀랐습니다. 어떤 일에 접근할 기회조차 없다는 점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실제 남가주대(USC) 연구팀이 2014년 할리우드 흥행작 100편을 분석한 결과, 여성 제작진 비율은 15.8%에 불과했다. 감독이 1.9%로 가장 적었고, 작가는 11.2%, 제작자는 18.9% 등이었다.

제니퍼 리 감독이 겨울왕국 속 캐릭터 '올라프'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제작진은 "올라프의 솔로 무비 제작 계획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어떻게 극복했나요.

"일로 보여줘야죠. 매일같이 제가 한 작업을 보여주려고 했고, 작업에 집중했습니다. 회의할 때 제가 그 방에 있는 유일한 여성이어도 수줍어하지 않았어요. 디즈니에 처음 출근하고 9년 가까이 지났는데, (남녀 간) 균형에서 더 나아졌고,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10대 딸을 둔 엄마입니다.

"딸이 16세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딸을 깨우는 걸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이는 일어나서 자신이 등굣길에 들을 음악을 고르죠. 하루를 보람차게 보낼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는 음악을 고릅니다. 딸과 노래도 같이 부르고, 장난도 칩니다. 가정생활은 평범하고 차분하게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되고 싶나요?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대처할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딸을 키우고 싶어요. 부모는 자식들이 항상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사실 우리가 모두 알잖아요 어려운 시간은 온다는 걸. 그걸 잘 헤쳐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왕국

―'겨울왕국2' 개봉으로 바쁜 일정 중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한국 관객들은 저희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히 콕 집어 겨울왕국에 그렇습니다. 겨울왕국2 개봉 시기에 맞춰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먼저 요청했습니다. 개봉 첫 주말 동안 한국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한국 관객들에겐 특별한 게 있습니다."

실제 제니퍼 리를 비롯한 크리스 벅 감독, 이현민 수퍼바이저, 피터 델 베초 프로듀서는 지난 23일부터 27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어떤 면이 특별한가요.

"한국 팬들과는 동질감이 있습니다. 제작자인 저희가 등장인물을 아끼듯 캐릭터를 아껴줘요. 겨울왕국2 추진 여부를 고민하고 있을 때, 피터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저와 크리스는 LA에 남아 '다음 편에서 엘사를 둘러싼 궁금증을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피터가 한국에서 돌아와 '팬들하고 만난 이야기'라며 해준 대화 내용이, 저와 크리스가 나눈 것과 똑같더라고요. 우리가 생각한 방식대로 믿고 속편을 진행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CCO로서 당신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디즈니 사람들이 최대한 좋은 이야기꾼이 될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고, 메시지를 분명하게 합니다. 사내 인재 개발과 창작자 양성에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역할을 무척 좋아합니다. 이제 겨울왕국이 끝났으니 저의 원래 역할로 돌아가야죠."

디즈니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해당 영화 제작 기간 태어난 제작자의 아이 이름을 게재한다. 이른바 '프로덕션 베이비스'다.

―최근 한국에서 이 프로덕션 베이비스가 화제가 됐습니다.

"디즈니는 '가족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를 최우선 가치로 삼습니다. 동시에 가족 친화적인 기업이고요. 일도 매우 열심히 하지만, 가정과 직장에서의 삶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도 많이 합니다. 영화를 진행하면서, 가족이 늘어나는 것처럼요. 우리 직원들은 서로 매우 잘 알고, 항상 지지해주려고 합니다."

―어릴 때 디즈니를 보고 자란 세대가, 다시 디즈니를 보며 감동받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중에 다시 봤을 때도 무언가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늘 여러 층이 존재하도록 노력하죠. 쉽지 않은 일이어서 매번 '제대로 해냈으면' 하고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새로 준비하는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당분간은 시나리오도 쉬고, 감독 일도 일단 그만하려고 해요.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개인적으로 다지는 시간을 가지려고요.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안으로 쌓으려고 합니다. CCO로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계속해서 좋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도록, 감독들이 요구하는 지원은 충분히 할 겁니다."

―겨울왕국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는다면요.

"겨울왕국2의 마지막 장면요. 이 장면에 대해선 고민도 하지 않았어요. 특히 여기 나오는 안나의 드레스가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드는데… 앗, 그런데 이거 스포일러 아닐까요?"

그가 옆자리 디즈니 직원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다.

제니퍼 리는 한국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가장 먼저 가족들을 위한 저녁을 만들러 갈 것이라고 했다. 보는 사람이 없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고 자학(自虐)한 영화감독도 있다지만, 우리가 인생을 견딜 수 있게 하는 마지막 힘 역시 가족. 그런 사람이 디즈니에 가는 걸까, 아니면 디즈니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걸까. 싱글맘으로 디즈니 CCO를 키워낸 '엄마'와 매일 아침 16세 딸을 깨우며 하루를 시작하는 '엄마'가 문득 한 프레임에 들어왔다.
조선일보 B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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