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진의 드라마를 맛보다] 풋고추·마늘 넣어 미운 그에게 한 입… 삼겹살을 굽다 그만 情이 들었다

송혜진 기자
입력 2019.11.26 03:01

'멜로가 체질'의 삼겹살

남편과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겠다면서 전화로 씩씩대던 친구를 며칠 뒤 만났다. 뜻밖에 표정이 밝았다. "화해했느냐"고 묻기도 전에 친구는 "남편이 어젯밤 갑자기 '너랑 나랑은 삼겹살 쌈도 같이 싸주던 사이였는데, 우리 이러지 말자'고 하는 거야"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어. 한창 연애할 때 이 남자가 내게 잘 익은 삼겹살에 풋고추며 마늘이며 넣고 쌈을 싸주면서 '너니까 주는 거야' 했었거든? 내가 그 말에 넘어갔었어.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더라고. 겨우 삼겹살 운운에 다시 넘어가는 내가 너무 쉽니?"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는 친구 어깨를 툭 쳤다. "얘, 네 남편 뭘 좀 안다!" 친구는 결국 배시시 웃었다.

밥정(情)만큼 무서운 건 없다. 생각해보면 한 끼 밥보다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도 별로 없으니까. 내게도 어떤 사람은 음식으로 기억된다. '라면 먹은 사람' '삼겹살 굽고 폭탄주 마신 사람' '파스타 먹은 사람'….

/영상미디어 이신영 기자
'파스타 먹은 사람'보단 '삼겹살 같이 구운 사람'이 더 친근한 건 당연하다. 기름이 튀고 온몸에 냄새가 배도록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서 서로의 밥 위에 올려줬다면 뭐 더 할 말이 있을까. 각자의 자리에서 전쟁처럼 격한 하루를 치르고 만나 불판 앞에서 함께 고기 굽고 잔을 부딪치는 건, 생각보다 더 소란스럽고 뜨겁게 그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선배가 얄미워도, 후배가 야속해도 같이 삼겹살 먹고 나면 맘이 또 조금 달라진다. 밥정은 그래서 징하고 그래서 못 말린다.

두 달 전 종영한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도 삼겹살이 등장한다. "삼겹살엔 파보단 미나리"라면서 진주(천우희)가 삼겹살이 구워지는 불판에 미나리 한 줌을 척 얹자, 범수(안재홍)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감돈다. '너도 오늘 고생했구나' '내일은 좀 나아질 거야' 같은 말은 그 순간 필요 없다. 삼겹살 먹으며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뿐이다. 그래서일까. 범수는 결국 진주에게 말한다. "정들었어요. 정들었다고요." 삼겹살이 오늘도 열일한 것이다.


조선일보 A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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