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과 대화' 명분 얻었지만… 스스로 '원칙' 허물고, WTO 제소 정지

김진명 기자
입력 2019.11.23 01:59

[지소미아 조건부 연장]
- 韓·日 손익계산 해보니
한국 "언제든지 종료" 전제로 체면치레 했지만 큰 틀에선 양보

日은 '수출규제와 지소미아는 무관' 원칙 고수하며 규제도 유지
"핵심소재 3종 개별심사 계속"… 한국에 내놓은건 '국장급 대화'뿐

우리 정부는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조건부로 연장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 해제가 안 되면 지소미아를 종료한다'는 원칙을 허문 것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도 중지했다. 일본은 대한(對韓) 수출 규제에 대한 대화를 하겠다면서도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를 유지했다. 일본이 취하기로 한 조치는 경제산업성과 우리 산업통상자원부 간의 국장급 대화뿐이었다.

강경화(왼쪽 사진) 외교부 장관이 22일 오후 일본을 가기 위해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를 나서며 취재진을 지나치고 있다.이미지 크게보기
강경화(왼쪽 사진) 외교부 장관이 22일 오후 일본을 가기 위해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를 나서며 취재진을 지나치고 있다. 강 장관은 이날 오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했다. 오른쪽 사진은 이날 일본에서 취재진 질문을 받고 있는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의 모습. /오종찬 기자·연합뉴스
한·일 간 협의 결과 도출된 방안을 발표하는 형식도 달랐다. 우리 측은 청와대의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이 전면에 나섰다. 반면 일본은 수출 규제 담당인 경제산업성의 이다 요이치(飯田陽一) 무역관리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소미아 다시 종료는 사실상 어려워

우리 정부는 이날 '지소미아 연장'이 아닌 '종료 통보 효력 정지'란 표현을 썼다. "언제든지 지소미아 효력을 종료시킬 수 있다는 전제"를 달아 체면치레를 했다. 청와대 고위 당국자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잠정적으로 지소미아 종료를 정지한다"고 말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도 "지소미아 종료의 완전한 철회가 아니라는 점을 일본 정부도 이해했다"며 "일본이 (수출 규제 해제를 않고) 마냥 시간을 끈다면 언제든 다시 지소미아를 종료시킬 수 있는 조건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8월 우리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를 발표한 뒤 미국이 보인 반발을 고려할 때 다시 지소미아를 종료시키기가 쉽지는 않다. 신각수 전 외교부 1차관은 "조건을 붙여 발표하긴 했지만 다시 지소미아를 종료하는 일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동결(凍結)'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지소미아 효력을 '연장'한 셈이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방위상은 이날 "지소미아에 따른 정보 교환을 하는 등 일·한 및 일·미·한의 연계를 확실히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국방부 당국자도 "현재와 같이 필요한 경우 양국 간 정보 교류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한때 '3개월' 등의 시한을 정해 수출 규제 해제가 안 되면 다시 지소미아를 종료하는 방안을 검토하다 포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한부 연장을 하려면 지소미아 문구를 개정해야 하는데, 이는 일본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지소미아를 둘러싼 불안정성이 계속되는 것은 미국이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韓 "WTO 제소 중지", 日 "규제 그대로"

지소미아 종료를 발표했을 때부터 우리 정부가 원한 것은 일본의 수출 규제 해제였다. 일본은 지난 7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우대국 명단)에서 제외해, 일본 기업이 불화수소 등 반도체 핵심 소재 3종을 우리 기업에 수출할 때마다 건별 심사와 허가를 받도록 규제했다. 그러나 이날 한·일 간 협의 끝에 나온 방안은 수출 당국 간에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뿐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의 이다 부장은 이날도 수출 규제 대상인 3개 품목에 대해 "앞으로도 개별 심사를 통해서 허가를 내줄 방침"이라고 했다.

우리 측은 "일본이 (수출 당국 간 대화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대화가 재개됐다"며 "만약 수출 규제와 지소미아 연계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해결 상황은 불투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일본은 한국이 WTO 제소 절차를 중지한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경제산업성의 이다 부장은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가 WTO 제소 절차를 중단한다는 통보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간의 양국 간 교섭 경과를 말하며 "한국 측이 수출 관리 현 상황의 문제점에 대해 개선을 향한 의욕을 보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도 했다. 서로 다른 얘기를 한 것이다.

日 발표문에 징용 얘기 없다지만…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오늘 일본 측 발표에 강제징용 문제는 없다"며 "강제징용 문제가 안 풀리면 수출 규제도 풀 수 없다는 일본의 연계 전략을 우리는 수출 규제와 지소미아를 연계하는 전략으로 맞받아 싸워 깼다"고 했다. 그러나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무상은 이날 저녁 "현재 최대의 과제, 그리고 근본 문제는 구(舊)조선반도 출신 노동자(징용 피해자) 문제"라며 "한국이 하루라도 빨리 국제법 위반의 상태를 시정하도록 계속해서 강하게 요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A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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