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박정희를 친일파 비난한 다큐 '백년전쟁'...대법 "방통위 제재는 위법" 파기 환송

정준영 기자
입력 2019.11.21 14:30 수정 2019.11.21 16:56
김명수 등 7명 "공정성 위반 아냐" VS 6명 "사실 왜곡"
6년전 '백년전쟁'엔…이승만, 독립자금 횡령한 인물
박정희, 한국 경제성장 공로 가로챈 인물로 묘사돼
방영 이후 대한민국 전체에 '역사전쟁' 일으켜
박근혜 정부 방통위서 징계 및 경고 제재 처분

연합뉴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묘사해 진보-보수 간 역사 논란을 부른 '백년전쟁'이 편향적이라며 방송통신위원회가 제재한 것에 대해 대법원이 원심 판결을 뒤집고 부당하다고 결론냈다. 방통위 제재가 내려진 지 6년 만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백년전쟁'을 방송한 시청자 제작 전문 TV채널 시민방송이 "제재 조치 명령을 취소하라"며 방통위를 상대로 낸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전원합의체는 김명수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대법관 12명(법원행정처장 제외)이 참여한다.

대법원은 "'백년전쟁'이 방송의 객관성·공정성·균형성 유지의무와 사자(死者) 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재판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와 관련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이 방송도 방송심의 규제 대상에 해당하는지, 규제 대상이 맞는다면 규제 위반에 해당하는지가 다퉈졌다.

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은 만장일치로 '백년전쟁'이 심의대상에 해당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방송법은 방송 분야 전반에 대해 심사하도록 했고, 보도 프로그램은 공정성과 공공성에 대한 요구 정도가 다른 방송 분야보다 더 강할 뿐"이라면서 "최근 방송 분야의 구분은 그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서로 다른 분야의 융합이 활발해 심의대상을 보도 프로그램으로 한정한다면 방송심의 제도가 제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 방통위 제재 두고 둘로 나뉜 대법관…"부당하다" 7명vs."적법하다" 6명
그러나 '백년전쟁'에 대한 방통위 제재가 적법했는지에 대해서는 부당하다는 의견이 7명, 적법하다는 의견이 6명으로 첨예하게 갈렸다.

김 대법원장과 김재형·박정화·민유숙·김선수·노정희·김상환 대법관 등 다수 의견 7명은 "'백년전쟁'이 시청자에게 주는 전체적 인상은 기존에 입론된 역사적 사실과 전제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 정도에 그치고, 이미 많은 사람에게 충분히 알려져 사실상 주류적 지위를 점한 역사적 사실과 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다양한 여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라고 했다. 사실 왜곡이나 편항적 전달 등 객관성과 공정성 의무를 위반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균형성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진 시청자가 접근 가능한 방송 기회가 보장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봤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도 아니라고 봤다. 이들은 "방송내용은 외국 정부의 공식 문서와 신문기사 등의 자료에 근거해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되고,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논쟁과 재평가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다수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방송내용을 심의할 때 매체, 프로그램 특성 등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백년전쟁'은 유료 비지상파 방송매체를 통해 방영된 시청자 제작 프로그램이어서 심사 기준을 완화해서 적용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반면 조희대·권순일·박상옥·이기택·안철상·이동원 대법관 등 반대 의견을 낸 대법관 6명은 "'백년전쟁'은 제작 의도에 부합하는 자료만을 취사선택해 방송내용 자체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아 객관성을 상실했고, 제작 의도와 상반된 의견은 전혀 소개하지 않아 공정성·균형성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들 대법관은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부분은 누락하고, 편집 의도에 부합하는 일부분만을 발췌했으며 근거 자료의 번역은 오역을 가장해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면서 "추측이나 과장, 단정적 표현 및 편집기술을 통해 사실관계와 평가를 자신의 관점으로 왜곡시켜 역사적 인물을 조롱하거나 희화화했다"고 했다.

또 "방송 내용이 공익과는 무관하게 주로 두 전직 대통령 개인의 인격을 훼손하려는 악의적 목적이나 동기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봄이 상당하고, 모욕과 조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저속한 표현으로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명예훼손을 인정했다. 반대 대법관들은 "다수 의견을 따를 경우 선별되고 편향된 일부 자료만을 근거로 특정 역사적 인물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내용의 방송을 하더라도 '역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취하기만 하면 아무런 제재조치를 할 수 없게 되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덧붙였다.

◇ 박근혜 정부 시절 진보·보수 간 '역사전쟁' 촉발...하급심 결론 뒤집혀
시민방송은 2013년 1월~3월 총 55회에 걸쳐 진보 성향 민간 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시리즈 두 편을 방송했다. 이 전 대통령을 다룬 ‘두 얼굴의 이승만'과 박 전 대통령을 다룬 ‘프레이저 보고서 제1부’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면서 독립자금을 횡령한 인물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일본 침략주의자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가며 한국 경제성장의 공로를 가로챈 인물로 묘사한 방송이었다.

이 방송은 진보-보수 간 '역사전쟁'으로 이어졌다. 시민단체 시대정신은 3월 말 "'백년전쟁'이 심각한 역사 왜곡을 가져오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를 비전문가와 감성의 영역에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 단체 건국이념보급회는 "백년전쟁에 담긴 주장은 거짓말이거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같은해 4월 반박 동영상을 제작해 공개하기도 했다.

반면 현 여당인 당시 민주통합당은 3월 논평을 내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는 친일청산운동이 불편하다고, 좌파로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명백한 ‘역사왜곡’"이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출범이 친일파 후손들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전주곡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이와 관련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4월 언론사 간부들과 함께 한 오찬 자리에서 "역사는 참 중요하다. 정확하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공유하고 가르치는 문제는 그 나라 미래를 위해서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해 8월 방통위는 심의규정 위반을 이유로 방송 관계자들에 대한 징계 및 경고를 명령하고, 제재 사실을 방송으로 알리도록 했다. 방통위는 "사실을 왜곡하거나 불명확한 내용을 사실인 것으로 방송해 시청자를 혼동케 하고,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다루면서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 "직설적이고 저속한 표현을 사용한 방송으로 전직 대통령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덧붙였다.

시민방송은 처분에 불복하고 재심을 청구했으나 2013년 11월 기각되자 행정소송을 냈다. 시민방송 측은 재판에서 "방송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의견 진술 기회를 주지 않고 제재한 것은 절차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또 "문제의 방송 내용은 방통위 심의대상에 해당하지 않으며, 공익을 위한 것이어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도 않는다"며 방통위 제재는 재량권 남용이라고 주장했다.

1·2심은 그러나 "방송의 목적은 합리적 의심에 기초한 것으로 볼 여지가 없지 않다"면서도 "방송의 구성, 내용, 편집 등을 볼 때 새로운 관점 내지 의혹 제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 입장에 유리하게 하거나 사실을 오인하도록 적극적으로 조장해 전직 대통령들을 희화화하고 있다"며 방통위 제재가 적법했다고 판단했다.

시민방송 측이 상고해 지난 2015년 8월 사건을 넘겨받은 대법원은 3년 5개월 만인 올해 1월 전원합의체에 넘겨 사건을 심리해왔다.

이와 별도로 '백년전쟁' 제작진은 작년 2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올해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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