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도떼기시장

임민혁 논설위원
입력 2019.11.21 03:15

2015년 흑인 교회 총기 난사 희생자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하던 오바마 대통령이 갑자기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던 6000명의 참석자는 이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언론은 "비극을 승화시켜 미국인을 하나 되게 했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각본 없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오바마는 노래를 부르겠다고 사전에 계획했고, 반대하는 아내와 참모들과 토론까지 했다고 한다. 잘 기획된 '쇼'였던 셈이다.

▶정치와 쇼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이는 모습 뒤에는 각본과 연출이 있다. '서민 이미지'를 위해 우리 정치인들이 시장에서 국밥·떡볶이를 먹는 것처럼, 미국·독일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길거리 프라이드치킨, 커리부어스트(소시지 요리) 가게가 정치인들로 북적인다. 주지사를 지낸 영화배우 슈워제네거는 "쇼 비즈니스가 할리우드에만 있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쇼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내용보다는 TV에 화려하게 나오는 행사를 좋아한다. 지난해 대통령이 시민들과 광화문에서 '맥주 타임'을 가졌을 때 청와대는 이런 홍보글을 올렸다. '프롬프터 없음, 마이크 없음, 청와대 직원조차 당황한 대통령의 파격 일정!' 하지만 일부 참석자들이 사전 섭외된 것으로 확인돼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을 들었다.

▶엊그제 '국민과의 대화'를 앞두고도 청와대는 '짜고 치기'가 아니라고 했다. 국민 패널 300명은 1만6000여명 신청자 중 무작위로 뽑았다고 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질문권을 얻은 17명 중 3명 이상이 문 대통령을 만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네티즌들은 '대통령 지지도가 가장 낮은 2030 남성이 거의 없다'는 의문도 제기했다. 패널들이 대통령에게 몰려가 사진 찍는 모습은 팬미팅을 방불케 했다.

▶결국 또 한 번의 쇼였다. 그런데 이번 쇼는 연출마저 엉망이었다. 행사장은 패널들이 여기저기서 "대통령님!" "저요!"라고 손 들고 소리치는 바람에 혼란의 연속이었다. 질문이 아니라 민원·하소연이 길고 두서없게 이어졌다. 사실상 방송 사고 수준이었다. 대통령 대답도 동문서답이거나 초점이 없었다. 친정권 방송 진행자도 "도떼기시장 같았다"고 혹평했다. 도떼기시장이란 질서 없는 시장판이란 뜻이다. 그 말 그대로였다. 인터넷에선 '문재인 지지하지만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는 반응들이 적지 않은데 그럴 만했다는 생각이다.



조선일보 A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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