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직권남용' 벌주는 '직권남용'

김정환 사회부 기자
입력 2019.11.21 03:13
김정환 사회부 기자

2016년 말 '최순실 특검'을 시작으로 3년간 검찰을 출입했다. 문재인 정부 검찰의 '적폐 수사'가 주요 취재 대상이었다. 전(前) 정권 거물급 인사들이 수사받거나 재판에 넘겨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봤다. 그때마다 이들에게 붙은 혐의 중 하나는 직권남용이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정무직인 문화체육관광부 1급 실장 3명에게 사퇴 압력을 넣은 혐의도 직권남용이었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판에 개입했다는 혐의도 직권남용이었다. 직권남용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됐다.

그런데 김오수 법무부 장관 대행은 지난 8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검찰총장이 주요 사건은 수사 단계별로 법무부 장관에게 사전 보고하도록 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동안의 법무부 장관이 검찰 수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깬 것이다. 검찰이 지난 6일 "세월호 사고 관련 제기된 모든 의혹을 규명하겠다"며 '세월호 참사 의혹 특별수사단'을 만들겠다고 발표한 지 이틀 뒤다. 특수단 수사 대상에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법무부 장관 시절 세월호 사건을 수사한 검찰 수사팀에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인명 구조에 실패한 해경 123정장에 대해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지 말라"고 외압을 행사했다는 직권남용 의혹도 있다.

김 장관 대행이 이런 내용을 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검찰은 격하게 반발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때문에 화가 난 정권이 법무부 장관을 앞세워 검찰 수사를 주무르려는 것"이란 말도 나왔다. 조 전 장관 사건 수사로 뒤통수를 맞은 정권이 앞으로는 검찰이 현 정권 인사에 대해 수사를 못 하게 막겠다는 뜻이 아니냐는 것이다.

김 장관 대행은 19일 국회에서 "압수수색영장을 사전에 보고하는 내용은 포함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했지만,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에게 수사 단계별로 사전 보고하는 방안을 없앤다고 하지 않고 있다. 이 방안이 그대로 시행되면 검찰은 황 대표의 수사 외압 의혹을 수사하는 동안 수시로 현 정권이 임명한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받게 된다. 직권남용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에 대해 현 정권이 직권을 남용하는 셈이다. 김종민 변호사는 "2013년 프랑스는 법무부 장관의 수사 지휘가 독소 조항이라며 폐지했는데 우리 정부는 이를 역행하고 있다"고 했다.

현 정권은 환경부 산하기관에 있던 전 정권 인사들을 압박해 사퇴하게 했다. 이 사건을 수사해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과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을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기소한 수사팀 간부들은 인사에서 좌천시켜 옷 벗게 했다. 이번엔 검찰이 조 전 장관을 수사하자 대놓고 수사에 개입하겠다고 한다. 남이 하면 불법이고 내가 하면 정의라는 것인가. 이 정권은 상식 밖의 일만 하고 있다.



조선일보 A38면
효성 탄소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