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6명 살해 北선박 나포 당일 국정원 요구로 싹 소독해놓고...북송할 때는 증거 훼손 우려해 혈흔 감식 안했다

윤희훈 기자
입력 2019.11.08 18:15 수정 2019.11.08 23:00
정부, 나포 엿새만인 8일 北에 선박 인계
정부 소식통 "배 안에 범행 흔적 있지만, 증거 훼손 우려해 혈흔 감식 안 했다"
나포 당일 국정원 요청으로 농림축산검역본부서 선원과 배 소독 실시
범행 자백했다 해도 혈흔 감식 안하고 범행 단정은 너무 성급하단 지적도
배에선 쌀 95kg, 옥수수가루 10kg, 마른 오징어 40kg(포대 40여개) 나와

북한 선원이 동료 16명을 살해하고 남측으로 넘어올 때 탑승했던 선박을 8일 오후 해군이 북측에 인계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해상에서 선원 16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북한 주민 2명이 타고 온 선박에 대해 혈흔 감식 등 정밀 조사를 실시하지 않고 북측에 인계한 것으로 8일 확인됐다. 그런데 증거 훼손을 우려해 정밀 감식을 하지 않은 정보 당국이 선박을 나포한 직후엔 농림축산검역본부에 요청해 선박을 소독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역 때문이라고 하지만 증거 훼손 가능성을 우려해 혈흔 감식을 하지 않았다면서 배를 소독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北선박 증거 훼손 우려해 혈흔 감식 안해

한 소식통에 따르면 정부는 북 선박에 대한 혈흔 감식 등 정밀 조사를 할 경우 북측 입장에선 증거 훼손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보고 감식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통은 "우리가 혈흔 감식 등 포렌식 검사를 하면 증거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며 "증거 보존을 위해 선박에 대한 정밀 감식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포렌식 수사를 하지 않더라도 정황 증거상 북한 주민 2명이 살인을 한 사실이 명백했고, 이를 근거로 이들을 북으로 추방한 것"이라고 했다.

◇나포 당일 국정원 요청으로 검역본부서 선원·배 소독

그러나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국정원은 북한 주민 2명이 타고온 어선을 나포한 지난 2일 오전 10시 20분쯤 유선으로 농림축산검역본부에 어선에 대한 소독과 검역을 요청했다. 신고를 접수한 검역본부는 직원 9명을 파견해 같은 날 오후 1시 45분부터 밤 10시까지 선박에 대한 검역과 소독 작업을 진행했다. 북한 주민이 타고 온 선박에서는 쌀 95kg과 옥수수가루 10kg, 마른 오징어 40kg(포대 40여개) 등의 음식물이 나왔다. 검역본부 측은 검역 결과 이상 검역물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문가들 "살인 현장 물청소 한 것과 뭐가 다른가"

현장 검역관들은 검역에 이어 어선 내·외부를 소독했다. 북한 주민 2명이 입고 있던 옷과 신발도 소독했다. 한 전직 정보기관 고위 관계자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등으로 검역과 소독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시기이지만 살인 혐의와 관련한 증거를 찾기도 전에 선박과 북한 주민이 착용한 의복류까지 소독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대응"이라며 "살인 현장을 수사하는 경찰관이 현장 감식 전에 물청소를 한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고 했다.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이 입수한 동해 북한어선 검역조치 결과 보고서
◇"北선원 자백만으로 범행 단정 성급" 지적도

정부는 추방한 북한 주민 2명에 대해 살인 등 중대한 비정치적 범죄를 저질러 북한이탈주민법상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이들의 진술 외 범행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혈흔 감식을 하지 않고 북에 송환한 것이어서 지나치게 성급하게 돌려보낸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정부는 우리 수사·정보 당국이 북 선박에 대한 혈흔 감식 등을 할 경우 나중에 북측에서 증거 훼손 시비를 제기할 여지가 있다고 보고 감식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선원과 배에 대한 소독까지 실시한 마당에 증거 보존을 위해 선박에 대한 정밀 감식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혈흔 감식도 하지 않고 북한 주민 2명이 선상에서 16명을 살해했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는 지적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이와 관련,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전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타고 온 배에 여러가지 흔적이 있었다"고만 했다. 김 장관이 언급한 흔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물음에 통일부는 "기밀 사항이어서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부는 추방된 북 선원 2명이 선상에서 선장과 선원 등 16명을 살해하고 시신과 살해에 사용한 둔기 등은 모두 바다에 버렸다고 밝혔다. 한 범죄 수사 전문가는 "시신과 살해 도구가 없는 상황에서 기초적인 혈흔 감식조차 하지 않고 범죄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설령 북 선원 2명이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해도 이를 뒷받침할 최소한의 증거 조사는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배 안에서 육안으로 혈흔이 발견됐다 해도 사람의 혈액인지에 대한 확인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은한 통일부 부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증거 확보 등 실체적 진실 규명에 한계가 있는 점을 (추방 결정에) 고려했다"면서 증거 확보에 어려움이 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통일장관, 北 주민 귀순 의사 질문에 말 바꿔

추방 당한 북한 주민 2명의 귀순 의사에 대한 김 장관 설명도 달라졌다. 김 장관은 전날 국회 외교통일위 전체회의에선 추방한 북한 주민 2명에 대해 "우리 해군에 제압된 직후 귀순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으나 일관성이 없어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장관은 이날 국회 예결위 회의에선 "(북측으로 추방된 북한 주민 2명이) 심문 과정에서 '죽더라도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진술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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