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악의 실패, 최고의 교훈

입력 2019.11.02 03:00 수정 2019.11.04 15:16

[아무튼, 주말]

호텔 미니바 위스키로 파티 뒤… 당에 찍혀 승진 10년 꿇었다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북한에서 작은 실수로 승진이 10년 미뤄진 적이 있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 정책' 때 있은 일이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아셈정상회의에 참석한 유럽 정상들에게 북한과 외교 관계를 맺어달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던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가 제일 먼저 응했다. 영국과 북한은 1995년부터 외교 관계 설정 협상을 벌여 왔지만 영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 삼으면서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영국이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 그해 12월 북한 외무성은 당시 유럽담당 국장이었던 김춘국과 과장이었던 나, 영국 담당자 박강선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런던에 급파했다.

런던에 도착하니 영국 측에서 다음 날 조찬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조찬장에서 영국 측은 이번 협상부터는 북한 대표단이 상주 대사들만 이용하는 '대사 복도'를 이용하게 된다고 통보했다. 그전까지는 외무부 일반 출입구를 이용했었다. 외교 관계가 없는 나라에 상주 대사들만 이용하는 출입구를 열어주겠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 국가로 상대해 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협상이 시작되자 영국 측은 북한과 외교 관계를 빨리 맺으라는 총리의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당시 영국 총리실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출신 부시가 당선될 경우 한국과 약속한 북한과의 외교 관계 설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보고 속전속결 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12월 12일 북한과 영국은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매일 몇 시간밖에 자지 못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일한 북한 대표단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영국 측은 북한 대표단의 호텔비를 부담하겠다고 했다.

일러스트= 안병현
나는 회담을 성과적으로 마무리 지었으니 위스키라도 한 병 사서 방에서 실컷 마시자고 했다. 후배인 박강선이 "영국 외무부 북한 담당자에게 확인해 보니 호텔 미니 바를 이용해도 된다고 하더라"며 외부에서 술을 사지 말자고 했다. 그날 저녁 셋이서 각자 방에 있던 미니 바의 작은 병 위스키를 다 마셨다.

대표단은 승전고를 울리며 평양에 도착했다. 김정일이 잘 표창해 주라는 지시에 따라 단장이었던 국장 김춘국에게는 국기(國旗)훈장 1급이, 나는 부국장으로, 박강선은 지도원에서 과장으로 승진시키는 안이 인사처에 올라갔다. 그런데 이때 일이 터졌다. 영국 외무부에서 북한 외무성 팩스로 대표단이 호텔에서 이용한 미니 바 비용 800달러를 내라는 독촉장을 보낸 것이다. "당신들이 마시라고 해놓고 왜 돈을 내라고 하느냐"고 답신을 보냈다. 런던으로부터 답이 왔다. "마셔도 된다는 말이었지 돈을 내준다는 말이 아니었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북한 외무성의 국제 전화와 팩스로 오가는 내용은 자동으로 외무성 당 위원회와 국가보위부에 보고된다는 것. 곧 공식 조사가 벌어졌다.

북한 외교관은 외국 호텔에 체류하는 경우 국가 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어 원칙적으로 방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돼 있는데 셋이서 미니 바를 다 털어 마셨으니 당연히 큰 비판감이었다. 승진, 표창은 없던 일이 됐다. 우리는 비판서를 쓰고 당 생활 총화 무대에서 외무성 직원 1000여명 앞에서 비판 토론을 했다. 김춘국 국장에게는 1년간 당 책벌, 나와 박강선에게는 1년간 해외 출장 금지 등 징계가 내려졌다. 왜 박강선의 말을 직접 영국 담당자에게 확인해 보지 못했을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11년 부국장으로 승진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돈 문제만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그때로부터 19년이 흘렀다. 대표단 단장이었던 김춘국은 2016년 초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로 일하다가 간암으로 로마에서 사망했고, 박강선은 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관 서기관으로 일하다가 2015년 무슨 영문인지 아내, 자녀와 함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다. 동료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언젠가 회포라도 풀 수 있으련만…. 그 '미니 바 사건'은 내게 인간은 어디에서 살든 비상식적인 일은 하면 안 된다는 평생 교훈을 남겼다.

꽃게무침의 추억… 이젠 손을 내밀자, 막무가내로

정유정 소설가


타인에게 좀처럼 손을 내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의 도움, 혹은 호의가 필요한 상황인데도 입 꾹 닫고 혼자 끙끙대기 일쑤다. 쉬 해결할 일을 수습 불가 상황까지 몰고 가 혼자 폭발해버린다. 혼자 상처받고, 길이길이 기억하며 서러워한다.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묻는다. 대체 혼자 왜 그러는데?

나는 이에 대한 답을 백 가지쯤 댈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인간이었기 때문에. 타고나기를 요령 머리 없는 성격이라, 가까이에 손 내밀 사람이 없어서, 있더라도 거절당하면 무안하니까, 상대에게 부담을 주거나 민폐가 될까 봐, 혼자 해결하는 게 속 편해서. 그 외 95가지 이유로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출산휴가에 들어가기 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퇴근 무렵이 되자 난데없이 허기가 졌다. 갓 지은 쌀밥에다 빨간 꽃게 무침이 먹고 싶었다. 그 욕망이 너무나 막무가내여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맛집을 검색해 찾아가거나, 집으로 배달시킬 수도 있겠지만, 당시엔 사정이 좀 달랐다. 우선 꽃게백반 집이 흔치 않았다. 비싼 꽃게 무침을 밑반찬으로 주는 식당은 더욱 없었다. 있다 해도, 만삭의 배를 내밀고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혼밥'이 이상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으니까. 같이 가자 부탁할 만한 이도 없었다. 남편은 그날 회사 회식이 있었다. 팀 동료들은 점심나절에 이미 "고기 먹고 힘내서 순산하라"며 근사한 갈빗집에 데려가 준 바 있었다. 내 입에 딱 맞는 꽃게 무침을 해줄 수 있는 어머니는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자력으로 해결하자, 마음먹었다.

시장에 들러 꽃게 여덟 마리를 '덥석' 샀다. 미나리 한 단과 대파 한 단, 빨간 고추와 청양고추, 후식으로 먹을 과일….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배가 고프면 물건을 턱도 없이 많이 사는 버릇이 있다. 덕택에 장바구니가 축 처진 배만큼이나 무거웠다. 집으로 오는 길은 명왕성만큼이나 멀었다. 배 속의 아이는 엄마 사정 보지 않고 발을 질러댔다. 꽃게를 향한 절절한 열망이 없었다면, 장바구니를 패대기치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밥부터 안쳤다. 손을 달달 떨며 필사적으로 모셔온 '꽃게님'과 채소를 손질하고 양념을 만들었다. 내 인생에서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집중해서 음식을 만든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꽃게무침이 큼직한 유리그릇에 가득 찼을 땐, 어찌나 가슴이 뛰던지.

나는 유리그릇을 식탁 귀퉁이에 올려놓고, 밥을 푸려고 몸을 돌렸다. 경험자라면 알 테지만, 만삭 무렵엔 다리보다 둔하디둔한 배가 방향전환을 먼저 한다. 뭔 말이냐 하면, 돌아서면서 유리그릇을 쑥 내민 배로 밀어버렸고, 뭔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을 땐 그릇이 부엌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난 후였다는 얘기다. 어찌나 호되게 박살 났는지, 꽃게가 사방천지로 흩어지고 양념장은 천장까지 튀어 있었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꽃게 조각들을 집어 들고 살펴봤다. 유리 조각 범벅이었다. 씻어서 다시 만들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남편이 돌아와 어깨를 흔들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넋 놓고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 묻자 대답 대신 울음이 터졌다. 상황을 알아서 알아차린 남편은, 끝내주게 맛있는 꽃게 백반집에 지금 데려가 줄 테니 그만 울라고 했다. 나는 울음을 딱 그치고 벌떡 일어났다. 빨리 가.

끝내주는 꽃게 백반집 문은 닫혀 있었다. 밤 10시가 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이번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 소동의 원인은 전적으로 내게 있었다. 남편에게 회식 대신 꽃게를 먹으러 가자고 말하지 않은 내게. 친한 동료에게 부탁해 볼 수도 있었을 테다. 나랑 꽂게 먹으러 갈래?

이후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손을 내밀 수 있게 됐다. 일단 내밀어보면, 세상에는 기꺼이 손잡아주는 이가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 역시 누군가 내민 손을 계산 없이 잡아 줘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이 호혜적 행동의 이름이 '연대'라는 것도.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그러니 도움이 필요하면 손을 내밀자. 내게 내민 타인의 손을 외면하지 말자.

발가락 잘라 손가락 살리려다… 수술 실패로 절망했었다

황종익 '손가락 의사' 안산 두손병원장


25년쯤 전 일이다. 30대 여성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어려서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잃었지만 복구할 생각조차 못하다가 이제야 재건(再建) 성형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왔다는 것이다. 평생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했다. 손가락이 없는 경우 발가락을 활용해 재건 수술을 한다. 나는 당시 발가락 이식술 26건을 성공한 경험이 있어 자신감이 넘쳤다. 둘째 발가락이 검지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수술을 했다.

그런데 수술 후 이틀째 혈관에 이상 증세가 보였다. 재수술을 했지만 이튿날도 혈관 마비 증세가 왔다. 일주일이 지난 후 수술은 실패로 판명됐다. 손가락도 못 살리고 발가락도 잃게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환자 분에게 수술 전 실패 가능성을 설명했다고는 하나 내 책임이었다. 그분이 당면하게 될 후회와 절망은 내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의사로서 절망감에 빠져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 2년간 같은 수술을 피했다. 내 인생 최악의 기억이다.

그 후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 여덟 개를 잃은 미얀마 출신 근로자가 병원을 찾아왔다. 발가락을 이식해 성공했다. 나는 트라우마에서 조금 벗어났다. 이후로도 실패 없이 수술에 성공했지만, 죄책감과 절망감으로 같은 수술을 가급적 꺼리게 된 기간이 한동안 지속됐다. 넘치는 자신감만으로 환자를 대하지는 않았나, 그분들 인생과 아픔에 공감하는 게 부족하지는 않았나를 매일 되뇌었다. 의사에게 실패는 치명적인 결과를 부른다. 환자 100명을 살려도 1명이 잘못되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에 주의와 노력을 다해야 함을 다시 깨닫는 시간이었다. 지금도 그 마음으로 수술실에 들어간다.

가난에 의사의 꿈 접어… 나 같은 아이들에게 기회 줄 것

스롱 피아비 여자 당구3쿠션 챔피언

캄보디아에서 학교에 다니던 열 살 때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에도 많았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병원 놀이를 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의사라는 꿈을 품게 됐다.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한창 공부해야 할 열일곱 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학교에 더는 다닐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의사라는 꿈을 꾼단 말인가. 단념하면서 인생의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경험한 최악의 실패였다.

꿈을 잃어버린 채 원치 않는 삶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농부였고 나는 큰딸이었다. 어떻게든 집에 보탬이 되려고 감자 농사를 도왔다. 그래도 인생에 실패했다는 자괴감을 좀처럼 떨치기 어려웠다.

그 무렵 어느 한국인으로부터 국제결혼 제안을 받았다. 막막하지만 우리 가족에게 도움을 주면서 한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다행히 좋은 남편을 만나 난생처음으로 당구를 배웠다. 엎드려 자세를 잡고 당구를 치는데, 스스로 멋있다고 생각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지금은 당구 3쿠션 프로 선수로 살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상상도 못한 새로운 인생이다. 의사가 되지 못한 설움, 실패의 경험이 지금은 오히려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캄보디아에 학교를 세워 가난 때문에 공부할 기회를 빼앗긴 아이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일도 시작했다. 내가 마치지 못한 학업에 대한 미련을 그렇게 풀고 싶다. 좌절해 보았기 때문에 이번엔 꼭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크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난다. 이게 다 최악의 실패 덕분이다.

도움 주고 배신 당해… 허세 심한 사람은 멀리하라

터키 출신 언론인 알파고 시나씨

터키에서 태어나 2004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 오고 나서 내 인생 최악의 실패를 맛봤다. 터키에서부터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이 몇 년 전 한국에 들어와 정착하는 과정을 힘껏 도와준 직후였다. 직장도 구해주고 그들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도록 어마어마한 도움을 줬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배신당했다. 그 친구들이 한국 사람이나 터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알파고는 반(反)정부 인사니까 같이 일하지 마세요. 필요하다면 우리를 쓰세요”라며 내 뒤통수를 친 것이다. 한국은 터키와는 매우 다르다. 그들이 험담하고 다닌다는 얘기가 금방 내 귀에 들어왔다. 큰 충격을 받았다. 연락을 끊어버렸다.

살아 보니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게 사기 치고 다니기 어렵다. 오래지 않아 다 들통난다. 나는 그 일을 겪고 나서 원칙을 세웠다. 허세가 심한 사람은 멀리하는 것이다. 그들은 코딱지만큼 일을 해놓고도 어마어마한 업적이라도 이룬 듯이 과대 포장한다. 자신을 제대로 평가할 줄 모른다. 그러니 주변 사람이 도와줘도 성에 안 찬다. ‘나는 대통령 같은 존재인데 왜 고작 장관 대접을 하느냐’는 식으로 도리어 화를 낸다.

그 친구들이 이따금 연락을 해왔다. 내가 그때 일을 거론하면 펄쩍 뛰었다. “우린 친구 사이인데 넌 그런 말들을 믿느냐?”고 오히려 따졌다. 참으로 뻔뻔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에겐 베풀지 말 것. 내가 그 실패에서 터득한 교훈이다. 전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무조건 잘했다. 그럼 불리할 일이 없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허세 부리는 사람은 철저히 거리를 둬야 한다는 걸. 초면에 어떻게 파악하냐고? 말 몇 마디만 들으면 금방 가늠할 수 있다.

닫힌 취업의 문… 전공 밖 분야 더 공부하는 습관 생겨

부동산 커뮤니티 운영자 ‘아기곰’ 문관식

내 생애 최악의 시기는 군대를 가지 않으려는 만19세 젊은이의 흑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예전 박정희 대통령 때에는 산업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공대생에 대한 우대 정책을 많이 썼다. 그 중 하나가 병역 특례 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방위 산업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5년 동안 근무하는 경우, 병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였다.

회사 입장에서는 5년 동안 우수 인력을 (기존 사원이 기피하는) 힘든 작업장에 투입해도 된다는 장점이 있고, 직원 입장에서는 군대 3년 가는 것보다는 월급도 받을 수 있으니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전공이 바로 건축과였다. 건축과의 경우 졸업 후 건설회사에 들어가면 중동으로 파견된다. 기후가 척박한 열사의 나라에서 가족과 떨어져 고생을 한다는 점은 있지만, 국내 연봉의 세 배 수준을 주었기 때문에, 한번 중동에 다녀오면 아파트 한 채 살 돈을 벌어온다는 것이 그 당시의 속설이었다.

문제는 막상 전공을 선택한 후였다. 3학년이 끝나던 시점에 중동 건설 경기가 수그러들면서 기존에 나갔던 인력마저 철수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취직이 되어 중동에 갈 것을 기대한 필자를 비롯한 동기생들은 군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군대에서 제대를 한 후에도 건설 경기는 살아나지 않았고, 취업의 문은 굳게 닫혀버린 것이다.

주위의 기대를 받고 살아왔던 사람이 취직조차 못하고 있다는 현실은 너무 암담하고 참혹했다. 언제 다시 채용의 문이 열릴지도 모르는 상황을 하루하루 견디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 때부터 취미로 공부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력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 전공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분야로 취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전화위복이 되었다. 내 전공이 아닌 분야에서 다른 인재들과 경쟁하고 살아남으려다 보니 남보다 더 공부하고 노력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대를 나왔으면서도 경제나 경영 등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아기곰의 모습을 갖추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 

인생은 본인이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생의 물결 속에서도 노을 놓지 않는다면, 인생의 물결은 처음 목표했던 목적지보다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 어려움을 겪고 있을 젊은이들과 공유하고 싶은 인생의 한 페이지였다.

달콤한 말을 경계하라… 북한이란 생지옥에서 얻은 교훈

북한 억류됐다 석방된 김동철 박사

사업을 할 때 철칙이 하나 있다. 가장 달콤한 말을 하는 사람을 가장 경계하라. 내 인생 최악의 실패는 그 철칙을 잊어버린 것이다. 2015년 10월 2일, 운명의 그날 나를 배신하고 북한에 넘긴 사람은 내가 가장 믿고 내게 북한 체제의 내밀한 정보를 가장 잘 전해주던 비밀정보원이었다. 그 뒤로 현세의 지옥 같은 노동교화소서 3년 넘게 온갖 고통과 치욕, 고문까지 겪으며 내 영혼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처절한 고난 속에서 끊임없이 후회했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북한 사회에서 이중스파이로 살면서, 나는 왜 그렇게 어리석게도 사람을 믿고 말았는가.”

기적 같은 생환 이후 북한 체제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활동을 하면서 나는 매일매일 새삼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위대함을 체감하고 있다. 내가 가고 싶은 장소에 가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체포당할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이 평범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제야 알았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결국 자유야 말로 가장 숭고한 가치이며 그 가치에 반하는 체제는 결국 붕괴하고 말 것이란 사실, 그게 바로 북한이란 생지옥에서 내가 배운 교훈이다.

조선일보 B5면
3일의 약속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