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차라리 一喜一悲하라

노석조 정치부 기자
입력 2019.10.22 03:13
노석조 정치부 기자

이수혁 신임 주미 대사가 부임을 일주일 앞둔 지난 16일 서울 외교부 청사 기자실을 찾았다. 그는 문정인 교수가 '자의 반 타의 반' 주미 대사직을 고사하는 논란이 한바탕 일어난 직후 대사에 내정됐다. 아그레망도 60일이 넘도록 받지 못하다 62일째가 돼서야 받은 이례적인 기록을 세운 터라 이날 유난히 기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는 이날 40여분간의 간담회에서 여러 차례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자"고 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 결정에 대한 미국의 계속되는 우려, 한·미 동맹 약화론, 스톡홀름 노딜 이후 더 경색된 미·북 비핵화 협상에 대해 견해를 묻자 이에 답하면서 나온 표현이었다.

이런 식이었다. 그는 한 기자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발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북한은 천둥·번개도 만들며 먹구름을 드리우다 갑자기 해를 쨍쨍 띄우며 파란 하늘을 보이곤 한다"면서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라서 말하는 데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비관론이 있지만, 스톡홀름 노딜은 '과속 방지 턱' 같은 것"이라고 했다. 북한 입장에선 협상이 너무 빨리 잘되면 안 돼 속도 조절을 하려고 일부러 협상을 결렬시키고 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를 전해 들은 전문가들은 "협상은 스톡홀름 노딜 이전 7~8개월 내내 꿈쩍도 안 했는데, 북한이 왜 과속 걱정을 하느냐"면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상황이 어떻든 일희일비하지 않는 자세는 백번 강조해도 과함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요즘 들어 이 허울 좋은 표현을 부쩍 많이 쓰고 있다.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스톡홀름 결렬 직후 "한 번의 만남으로 성급하게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했고,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지난 18일 경제·민생 문제로 대통령 지지율이 최저치로 떨어지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정부가 얼마 전만 해도 상황이 그럴싸해 보이기만 하면 '큰 진전이 이뤄졌다' '이전 정부가 하지 못한 걸 문재인 정부가 했다'며 '일희'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는 점이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2일 저녁 북 외무성 부상인 최선희가 미·북 협상 재개 소식을 전하자 거의 즉각적으로 '환영'의 뜻을 밝혔다. 정부가 조금이라도 유리한 것엔 온 국민에 '일희'하자고 부추기고, 불리하고 비판받을 만한 것엔 싹 정색하고 일희일비 같은 공자님 같은 말씀으로 대응하는 모양새다.

일희만 하고 일비해야 할 때 일비하지 못하면 같은 실수가 반복되기 마련이다. 정확히 25년 전 10월 21일 북한이 핵 포기하기로 약속한 '제네바 합의'가 체결됐다. 하지만 지금 북한은 엄연한 '핵무장국'이다. '일희'보단 '일비'하고 정신 줄을 다잡아야 할 때가 아닐까.



조선일보 A34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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