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칼럼] 누구 이런 '선비' 없나

입력 2019.10.22 03:17

미국·멕시코 고위 관료직을 걸고 대통령 비판
과거 이승만 대통령 때도 통렬히 비판하고 사표 던져
이 정부 성찰·고언 부재… 스스로를 뻔뻔하게 만들어

김대중 고문

문재인 정부의 가장 심각하면서 고질적인 문제는 내부의 성찰과 고언(苦言)과 토론이 없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그 어떤 정책의 수정이나 전환도 없고, 정치적 타협이나 후퇴도 없다. 당연히 그 어떤 실수도, 잘못도 인정한 적이 없다. 성찰과 토론의 부재(不在)는 스스로를 뻔뻔하게 만들고 만사에 안면몰수로 나가게 한다.

지난날 같은 사안에 대해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트윗을 했건 그것에 매이지 않는다. 지금 생각이 바뀐 것이라면 그만이다. 좌파 세상에서는 일관성보다 기회가 더 중요한 모양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면 되고 반찬 좋을 때 실컷 먹으면 되고 좋은 자리에 있을 때 챙기면 된다. 그러면서도 죄의식이 없다. 그 저변에는 '자기들은 언제나 옳다'는 허위의식이 가득하고, 문 대통령은 한쪽만 보고 간다.

조국 씨의 법무부 장관 임명으로 온 나라가 파국으로 혼란스럽고 반대 민심이 세상을 뒤흔들 때 이 정권 내부에서 '우리가 이렇게 밀어붙여도 되나?'를 고민한 흔적이 없다. 그 고민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청와대가 심각히 논의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대통령은 어제도 종교 원로들을 만나 '내 탓이오'를 말하기는커녕 정치권 탓만 했다.

소주성이나 탈원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다는 소리도 없고 지소미아 파기가 내각 차원에서 거론됐다는 흔적이 없다. 북한에 함몰돼 '북한'이라면 아무도 말을 못 꺼내는 사정은 가히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하다. 좌파 내부에서라도 그 시행착오나 사정 변경을 거론할 수 있어야 한다. 문 정권에는 그런 것이 없다.

문 정권 내부에서는 이견(異見)이 허락되지 않는 것 같다. 이견이랄까 조건 같은 것을 꺼냈다가 경제 총수도 날아가고 통일 부서 책임자가 퇴임의 변(辨)조차 없이 사라졌다. 대통령을 따라 들어온 좌파 인사들이야 어차피 한통속이라 그렇다 쳐도 그래도 그동안 정부 운용에 참여해온 공직사회는 분위기가 다를 터인데도 그 동네조차 조용하다. 청와대 내에서 한두 비서관이 다른 소리를 냈다가 내쫓긴 것이 전부다.

자진해서 '그만두겠다'는 사람은 더더욱 보지 못했다. 문득 지난해 연말에 미국 국방장관에서 자진사퇴한 제임스 매티스의 사임서가 떠올랐다. 그는 동맹의 중요성을 타기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서 "당신(트럼프)의 생각과 잘 맞는 사람을 택하라"면서 물러났다. 멕시코의 새 대통령을 도와 정권 창출에 기여했던 재무장관 카를로스 우루수아는 지난 7월 새 대통령의 극단적 좌파 정책을 못 참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이런 일들은 새 대통령이나 정부가 독재적으로 흐르거나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일 때 민주적으로 훈련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지금 트럼프의 탄핵을 둘러싼 과정에서 미국의 외교관 등 공직자들은 하나둘씩 트럼프의 비행(非行)을 증언하고 나섰다. 우크라이나의 내정간섭과 관련해 트럼프가 전격적으로 해임한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 마리 요바노비치는 트럼프를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미국의 EU 대사 고든 선덜랜드도 그중 하나다. 우리는 '나만 눈감고 다른 곳 보고 있으면 된다'는 식의 방관적 풍토가 지배적이다. 그런 점에서 조국 의혹에 눈감은 참여연대를 비판하면서 탈퇴를 선언한 김경률씨, "우리는 지금 진영으로 나뉘어 미쳐버린 것 아니냐"던 진중권씨 등은 비록 공직자는 아니지만 '바른 좌파'라는 인식을 줬다.

우리나라에도 과거 이승만 대통령이 전횡으로 흐를 때 그를 통렬히 비판하고 사표를 던진 '선비'들이 있었다. "정부 수립 이래 지금까지 고위 직위에 적재적소 인재가 등용된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탐관오리가 가는 곳마다 날뛰어 국민 신망을 상실하고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국가의 존엄을 잃어 신생 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지고 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나랏일이 틀려도 시비를 거는 자조차 없다. (중략) 국민에게 사과하고 일개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로 돌아가려 한다." (이시영 부통령), "대통령은 실정의 책임을 져야 한다. 충언과 직언을 외면하고, 인사 정책은 사적(私的) 친분으로 일관하고 자신이 임명한 장관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심복인을 차관에 배치하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심복인을 국장에 임명했다." (김성수 부통령), "행정은 제도상으로 운영돼야 하며 개인의 의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 일보라도 민주주의로부터 후퇴할 때는 자유세계로부터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 (조병옥 내무부 장관) 지금 이 나라 공직사회에 누구 이런 선비는 없는가?



조선일보 A34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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