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돌보고 괌 여행 동반까지… PB는 재테크 가이드? 현대판 집사?

권승준 기자
입력 2019.10.19 03:00

[아무튼, 주말]
조국 사태로 엿보는 금융권 PB의 세계

일러스트= 안병현
사모펀드 투자 자문, 가정 대소사 상담, 자녀들과 시간 보내기, 개인 운전기사, 검찰 수사 대비 컴퓨터 등 개인 물품 운반 보조, 괌 가족여행 동행…. 한국투자증권 영등포 PB센터 김경록 차장이 자신의 고객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아내 정경심 동양대 교수를 위해 한 일 중 세간에 공개된 목록이다. 이 리스트만 보면 그야말로 조 전 장관 가족의 일상 알파에서 오메가를 책임지는 수퍼히어로 혹은 집사가 따로 없을 정도다.

PB는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의 줄임말. 은행이나 증권사에서 고액을 맡긴 자산가들에게 전담 직원을 붙여 자산 관리와 관련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한다. 김 차장 같은 전담 직원을 가리키는 용어인 프라이빗뱅커도 줄여서 PB라고 부른다. PB는 금융사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통상 1억원부터 많게는 수십억원의 현금 자산을 금융사에 맡긴 이들만 만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서민들에게는 '그들만이 사는 세상'이지만, 최근 김 차장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면서 PB와 고객 간의 관계에 관한 다양한 면모가 노출됐다. '아무튼, 주말'은 김 차장의 유튜브 인터뷰 녹취록과 5~9년 경력을 가진 전·현직 금융권 PB 3명의 인터뷰를 통해 '프라이빗 뱅커'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취재에 응한 PB 3명 모두 회사나 고객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익명을 요청했다.

VVIP가 아니라도 VVIP 대우 해준다?

"(정 교수님의) 자금이 다 저희 회사에 들어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사모펀드 투자에 대한) 검토를 요청하셨겠죠."

2017년 5월 조 전 장관이 민정수석이 된 후 정 교수는 주식에 투자했던 자금을 다른 곳에 투자해야 하니 투자처를 검토해달라고 김 차장에게 요청했다. 현행법상 고위 공직자는 주식 직접투자가 금지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 주식을 처분해 예금으로 돌리거나 주식 백지신탁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지만, 정 교수는 달랐다. 김 차장은 "(정 교수님이) 공격적인 성향의 주식, 펀드로 자기 재산을 관리해오던 사람인데 남편이 고위 공직자 됐다고 예금을 권하는 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봤다"고 말했다. 그 이후 정 교수는 문제의 조 전 장관 5촌 조카가 관여한 코링크PE가 운용하는 사모펀드 상품을 가져왔고 김 차장에게 투자 자문을 한 뒤 10억원을 투자했다.

서울 강북권의 시중은행 PB센터에서 근무 중인 A 팀장은 "고객 투자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투자 권유를 하는 건 PB 업무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며 "흥미로운 건 그럴 경우 자신이 거래하는 회사 상품을 선택하는 게 보통인데 정 교수는 한국투자증권과 무관한 외부 상품을 가져와서 검토해달라고 한 점"이라고 말했다. 증권사 PB팀에서 일하는 B 차장도 "관리하는 자산이 최소 30억원 이상인 VVIP가 아니면 다른 회사 상품을 검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도 잘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특정 회사에 30억원 이상의 현금성 자산을 맡기는 VVIP라면 보통 전체 자산은 100억원을 훌쩍 넘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자사 PB가 관리하는 자산을 빼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른 투자 문의도 서비스 차원에서 해줄 수 있다는 게 B 차장의 설명이다. 게다가 정 교수는 김 차장이 관리하던 자산을 인출해 사모펀드에 투자하려 했다. 김 차장 입장에선 본인 실적과 직결된 문제인데도 그 투자 자문까지 응해준 건 매우 이례적이라는 게 PB들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정 교수가 이처럼 VVIP에 준하는 대접을 받은 건 회사 차원에서 당시 그의 남편이 정권 최고 실세 중 하나인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는 점을 고려한 서비스라고 보고 있다. A 팀장은 "회사마다 나름의 기준으로 VVIP 서비스 나가는 걸 결정하는 것이니 자산 외에도 정치적 고려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과 잘 놀아줘서 고맙다?

"(조 전 장관님이) 항상 그 말씀은 하셨어요. 항상 고맙다고. 우리 원이(조 전 장관 아들)와 잘 놀아줘서 고맙다고."

김 차장은 조 전 장관과 정 교수의 자녀들과도 상당히 친밀한 관계임을 시사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검찰 수사에 대비해 지방까지 내려가 정 교수의 컴퓨터를 가져오는 걸 도운 이유를 설명하면서 "교수님 가족이 감옥 같은 생활을 해서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며 "원이는 10일째 밖을 안 나오고 민이는 부산에 있었다"고 말했다. 김 차장이 평소 조 전 장관의 자녀들과 어울려 지냈고, 친구처럼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근했단 뜻이다.

정경심 교수와 그의 PB인 한국투자증권 김경록 차장(왼쪽)이 동양대에서 PC를 반출하는 모습. / 조선일보 DB
김 차장처럼 고객의 자녀와도 관계를 맺는 PB가 드문 건 아니다. 금융사에서 PB가 붙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자산 관리나 각종 수수료 면제, 호텔 이용권 제공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이젠 기본이고, 고객 유치를 위해 자산가 본인을 넘어 그 자녀들을 겨냥하는 게 추세이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나 유학설명회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혼기가 다가온 이들을 위해 고객 자녀 간 미팅 주선이나 인맥 쌓기용 파티 주최를 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청담동의 한 시중은행 PB센터에 수십억원을 예치한 고객 황모(57)씨는 "딸애 앞으로 파티 초청장이 왔길래 보냈더니 TV에 나오는 셰프가 나와서 출장 뷔페를 차려놓고 잘나가는 아이돌 가수가 게스트로 나왔다고 하더라"라며 "자녀가 결혼하면 PB가 버스 대절이나 축의금 받는 일까지 해주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B 차장은 "그런 '네트워킹' 파티에 PB들도 참여해서 고객의 자녀들과도 친분을 쌓는 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며 "자산의 증여나 상속 관련 업무를 처리해주는 것도 우리의 일 중 하나라서 자녀와 미리 신뢰를 쌓고 자연스럽게 대를 이어 고객 가족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PB에게 해결사나 집사 역할을 요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서울 여의도의 한 증권사 PB로 일하는 C 대리는 "고객 중에 자녀 영어 숙제를 봐달라고 하거나 해외여행을 갈 때 공항 픽업 서비스를 해달라는 분들도 있었다"며 "고객과 궁합이 잘 맞으면 그런 부탁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김 차장처럼 가족 여행까지 같이 가는 경우는 나도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남편은 점점 멀리 가버린다?

"(정 교수님이) 자기가 '(가정에서) 경제적으로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남편은 점점 멀리 가버리고', 그런 얘기를 참 많이 하셨어요. 저한테."

김 차장은 유튜브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며 "제가 정 교수님과 내연 관계라는 얘기들도 있었다"며 "다른 의도는 없었고 인간적 호감을 가진 고객님이니까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조 전 장관이 현실 정치에 뛰어들면서 정 교수가 집안 경제를 책임지게 되면서 김 차장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는 취지였고 그러다 보니 오해도 받았다는 것이다. A 팀장은 "PB가 고객과 상담하는 게 주로 돈 문제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내밀한 가정사까지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B 차장도 "고객 중에 한 분이 낚시가 취미여서 나도 낚시를 배워서 종종 같이 갔는데, 하루는 배를 타고 나가서 한참 낚시를 하다가 가정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으시더라"며 "PB의 일이라는 게 고객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들어주는 게 전부라도 가정 문제까지 상담해오는 걸 외면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김 차장도 정 교수의 동생이 옵션 투자로 큰돈을 잃었다든가 부모님 유산을 두고 형제간에 소송전까지 벌어진 일까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취재에 응한 세 명의 PB 모두 "아무리 고객이 중요해도 불법 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사람이 증거 인멸 시도를 하려는 걸 도와주는 PB가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 없다"며 "정 교수와 김 차장의 관계는 업계 기준에서 봐도 매우 이례적이고 공사 구분을 확실하게 하려는 최근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금융권 VIP(고액 예금 고객)에게 제공되는 프라이빗뱅킹(PB) 서비스

한국투자증권(10억원 이상)
투자자문, 각종 금융거래 수수료 면제 및 금융소득과세 신고대행 서비스 등

삼성증권(10억원 이상)
인터넷 면세점 우대, 골프 수행기사 서비스, 공항 라운지·특급 호텔 프리미엄스파 이용권 제공 등

신한은행(3억원 이상)
대학 입시설명회 개최, 고객 자녀 간 만남 주선 등

KEB하나은행(5억원 이상)
연 1회 고객 자녀 만남 주선 및 결혼 축하선물 제공, 악기 관리 서비스 등

NH(농협)투자증권(10억원 이상)
제철 먹거리 배송, 자녀 대상 경제 교육 서비스 등

조선일보 DB
사고 당한 고객 누울 수 있도록 비행기 4좌석 예약도

PB에게 가장 필요한 건 영업력


"PB가 갖춰야 할 핵심은 '영업력'입니다. 그리고 그 영업의 핵심은 고객의 신뢰를 얻는 것이죠."

시중은행 PB로 12년간 일한 베테랑 A 팀장은 "PB가 하는 일을 종합자산관리 서비스라고 하는데 '종합' 자가 왜 붙어 있겠느냐"며 "고객은 그저 투자 수익률 하나만 보고 PB를 고르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종합적으로 판단해 믿을 만한 사람을 PB로 고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금융권에서 PB를 별도로 채용하거나 특정한 자격 요건을 요구하는 곳은 거의 없다. 많은 고객을 거느린 스타 PB를 스카우트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내부에서 고객 유치 영업에 소질이 있는 직원들을 발탁해 PB 업무를 맡기는 게 보통이다. 물론 PB 업무를 위해 전문적인 금융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 공인 자산관리사 같은 자격증을 따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거액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쌓는 일이라는 게 PB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B 차장은 "영업이 중요하다고 하면 PB를 뽑을 때도 외모 같은 걸 많이 본다고 생각하는데, 외모는 많은 평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며 "오히려 고객과 상대하면서 생길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게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B 차장은 몇 년 전 큰 병원을 운영 중인 한 고객이 해외에서 의료 봉사 중에 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가능하다며 도와달라고 긴급 연락을 해왔을 때 최고의 비서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곧바로 항공사 지인을 통해 비행기 좌석을 4개 예약해 누워서 올 수 있도록 하고, 국내에서도 공항에 리무진을 대기시키는 등 그 고객의 국내 후송 업무 전반을 처리했다. 자산 관리라는 본업과는 전혀 상관없었지만, 그 일을 잘 처리한 덕분에 고객의 결정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C 대리는 "자산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투자와 관련된 온갖 정보를 듣는 것"이라며 "미국이나 유럽뿐 아니라 베트남, 브라질 같은 신흥시장 투자 정보를 원하는 분도 많기 때문에 그쪽 언어를 공부하는 게 요즘 PB들 트렌드 중 하나"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B3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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