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미각 잃은 요리책 60권 저자… "단맛부터 조금씩 돌아왔죠"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입력 2019.10.19 03:00

[아무튼, 주말]
음식전문가 말리나 스필러

말리나 스필러(Spieler·70)는 음식, 그리고 음식 맛보는 일이라면 세상 누구보다 자신있었다. 60권이 넘는 요리책을 냈고, 뉴욕타임스·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LA타임스·보나페티(Bon Appetit) 같은 주요 일간지와 음식전문지에 음식·레스토랑 칼럼을 썼으며, 미국 푸드네트워크와 영국 BBC 등의 음식 프로그램에 단골 출연한 음식 전문가다. 그런 그가 거짓말처럼 미각(味覺)을 잃었다. 지난 16~17일 서울에서 열린 '한식의 인문학 심포지엄'에 연사로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스필러는 "사고가 일어난 날은 하필이면 2011년 내 생일날이었다"고 했다. "케이크를 사려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휴대전화로 통화하면서 운전하던 여성이 몰던 대형 SUV 차량에 치였어요. 몸이 공중에 건물 3층 높이로 붕 떴다가 머리부터 콘크리트 길 바닥에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었어요."

말리나 스필러가 노보텔 앰배서더 서울 용산 호텔 뷔페에서 방울토마토가 가득 담긴 볼을 집어들었다. 유럽 ‘레드골드’ 토마토 홍보대사를 맡을 만큼 토마토를 사랑하는 스필러는 “매일 아침 토마토를 먹어보며 그날의 미각 상태를 확인한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두개골이 파열되고 두 팔의 뼈가 산산조각 났지만 스필러는 기적적으로 살았다. 의사들은 "몇 달 후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의사들은 그러나 스필러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미각을 다쳤다는 걸 알지 못했다. 친구들이 병문안 왔을 때였다. "제가 좋아하는 온갖 먹을거리를 사들고 왔지만,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어요. 엄청나게 좋아하던 음식이 너무 맛없어서 먹지 못하기도 했고요."

가장 절망적이었던 건 커피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지만 맹물처럼 밍밍했다. 아무런 맛이나 향을 맡지 못했다. 와인은 달거나 혹은 쓴맛만 나는 붉은 액체에 불과했다. 바나나는 무처럼 밋밋하면서 매니큐어 지울 때 사용하는 아세톤 냄새가 역겨웠다. 버섯은 태운 스펀지처럼 쓰고 물컹해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예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기도 했다. "어떤 고기를 먹는데 너무 맛있는 거예요. 친구가 '그거 베이컨이잖아!'라며 깜짝 놀라더군요."

스필러는 "미각을 잃으면서 자살을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고 했다. 미각 상실로 인한 우울증은 음식 분야에서 일해온 스필러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인간은 미각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혀의 미뢰(味�})와 입안의 침 분비액이 줄고, 맛을 감지하는 데 있어서 혀만큼 중요한 후각 기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이 사라지면서 삶의 활력을 잃고 우울증을 겪는 노인이 상당히 많다. 후각 손실은 치매의 초기 증상이기도 하다. 스필러는 이러한 노년기 미각 기능 손상으로 인한 우울증을 조금 더 일찍, 강도 높게 겪었을 뿐이다.

스필러를 검사한 뇌신경과 전문의들은 "교통사고로 뇌에서 미각과 후각을 관장하는 부분이 손상된 것 같다"고 진단하면서 "특히 여성의 경우 미각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으니 미각 회복 훈련을 시작하라"고 했다. 음식 전문가답게 스필러는 자신만의 '미각 재활치료 프로그램'을 짰다. "음식을 먹고 마실 때 의식적으로 맛과 향에 집중했어요. 커피를 마실 때는 업체에서 제공하는 테이스팅 노트(tasting note)에 적힌 풍미 특징, 예를 들어 꽃향·레몬향·캐러멜맛 등을 읽으며 기억하려고 애썼어요." 식사 때는 음식을 최대한 다양하게 맛보려고 노력했다. 스필러는 "한식은 집에서 김치를 직접 담가 먹을 정도로 예전부터 좋아했지만, 메인 요리와 함께 다양한 반찬이 딸려 나와 미각을 훈련하고 강화하기에 특히 알맞아 더욱 자주 먹었다"고 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미각이 차츰 돌아왔다. 단맛이 가장 먼저, 다음은 감칠맛이었다. "디저트 등 단 음식을 그리 즐기지 않았지만, 사고 이후로는 갈망(craving)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단맛을 찾게 되었어요. 이전에 그렇게 좋아하지 않던 생선도 하루 세 끼라도 먹을만큼 맛있었고요." 나머지 맛들도 차츰 돌아왔다. 커피의 즐거움도 조금씩 천천히 되돌아왔다.

돌아오는가 싶던 미각은 갑자기 다시 사라지기도 한다. "어제까지 맛있던 통밀빵이 톱밥 씹는 맛이거나,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한 주는 예전처럼 달콤하다가 그다음 주에는 새콤하게 느껴져요. 어렵게 써 놓은 글이 모두 지워져 백지장이 되는 기분이죠." 스필러의 미각은 상실과 복구를 지금까지 반복하고 있다. 스필러는 절망하지 않고 미각 재활치료를 계속해오고 있다. "먹는 즐거움을 포기한다는 건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으니까요."

조선일보 B4면
말모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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