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이 축구’에 탈북민들 "김정은의 의도적 냉대...文정부 향한 메시지"

권오은 기자
입력 2019.10.17 17:50
탈북민들, "무관중·무중계 당연"
"스포츠 통한 ‘평화 무드’ 의도에 ‘퇴짜 놨다’" 분석도
"우리는 국제룰에 얽매이지 않는다" 對南·對美 메시지
"스포츠 아닌 ‘전쟁’이라 생각…거친 몸싸움 당연"
‘김일성 경기장’ 상징성·체육절 70주년도 영향

"월드컵 예선이고 뭐고, 탈북민끼리는 생중계를 못할 거라 예상했습니다." "남북관계 악화됐는데, 문재인 대통령 보라는 메시지죠."

29년 만에 열린 축구 평양 원정 경기가 녹화 중계도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 나면서, 정말 ‘깜깜이 경기’가 됐다. 무중계·무관중·무승부 등 ‘3무(無)’ 경기를 놓고 정부 대응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탈북민들은 "생중계를 기대한 쪽이 아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경기가 치러진 ‘김일성 경기장’의 상징성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열린 남북 축구 맞대결은 ‘상상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전력이 열세인 북한 축구 대표팀이 패배하는 모습을 ‘인민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취재·중계 거부와 북한 선수들의 거친 경기를 통해 북한이 비핵화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외교적인 ‘대남·대미 메시지’를 보냈다는 분석도 나왔다.

지난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2022년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예선 한국 대 북한의 경기가 열리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① "김정은이 의도적 ‘냉대’ …"文 정부에 일부러 보여준 것"
탈북민들은 깜깜이 축구와 관련해, 가장 핵심 이유로 ‘남북 관계 문제’를 지적했다. 비핵화 관련 협상이 사실상 교착 상태로 이어지면서, 문재인 정부에게 일종의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정부가 스포츠 교류를 통해 지난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 때처럼 ‘평화 무드’를 조성하려는 것에 "퇴짜를 놨다"고 봤다.

서재평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은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과 통화에서 "북한은 다른 영역은 몰라도 스포츠는 ‘정신적’으로 무장하면 남한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단순히 남북 축구 경기에서 지는 것만을 우려해 무중계·무관중 조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결국 김정은이 의도적으로 한국을 냉대하는 상황을 연출했고, 이는 문 대통령에게 보내는 대남 메시지"라고 했다.

김흥광 NK지식인연대대표도 "김정은이 축구를 통해 자신이 비핵화 협상의 판도와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게임체인저’라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며 "무중계·무관중 등을 통해 ‘우린 국제관계나 국제적 룰에 얽매이지 않는다’ ‘난 누구도 못 건드린다’는 메시지를 한국과 미국 정부에 보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날 북한 선수들이 격한 몸싸움을 벌이면서 한국 선수들과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도 이런 ‘냉대’ 의도와 관계가 있다는 해석도 나왔다.

실제 정부는 이번 남북 축구 맞대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지난 16일 기자들과 만나 "무엇보다 많은 국민이 평창 동계 올림픽을 통해 평화의 물꼬를 튼 것처럼 스포츠가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했을 것 같다"며 "저희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렇게(생중계) 되지 못한 데 대해 똑같이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지난 15일 오후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남북 경기 중 양측 선수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요아킴 베리스트룀(Joachim Bergstrom) 북한 주재 스웨덴 대사 트위터 캡처
‘김일성 경기장’서 南에 패배?…"상상도 못할 일"
지난 15일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남북 경기는 생중계 무산에 이어 녹화 중계까지 불발됐다. KBS는 이날 "오후 5시 방송 예정이었던 남북한 간 축구 경기의 녹화 중계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앞서 지상파들은 귀국한 선수단을 통해 경기 영상을 담은 DVD가 들어오는 대로 방송하겠다고 예고했다. KBS는 녹화 중계를 취소한 구체적 이유는 밝히지 않았으나, 북한이 제공한 경기 영상의 화질이 떨어져 방송할 수 없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 축구 경기가 무관중에 생중계 없이 치러진 뒤, 녹화 방송조차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 나면서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다시 비난 여론이 불붙고 있다. 하지만 탈북민들은 경기 결과는 몰라도 중계와 관중이 없는 상황은 예상 가능했다고 입을 모았다.

우선 ‘김일성 경기장’의 상징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력이 열세인 남북 축구 경기를 알리는 것 자체가 부담이라고 설명했다.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대표는 "경기장 이름에 붙은 ‘김일성’이라는 인물의 상징성이 갖는 의미는 상상 이상"이라고 했다.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이나 잠실종합운동장처럼 단순히 국가의 대표적인 경기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린 남북 경기에서 전광판에 0-0 스코어가 표시돼 있다. 관객석은 모두 비어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통일부 등에 따르면 김일성 경기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기림운동장’이란 이름의 야구장이었다. 광복 후 평양공설운동장으로 이용하다가 모란봉경기장으로 그 명칭을 변경했다. 증축 공사는 거듭 이어졌고, 1982년 4월 10일 현재와 같은 김일성 경기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특히 김일성이 1945년 10월 평양에서 처음 연설을 한 장소로 북한에선 ‘혁명사적지’로 분류하고 있다.

김 대표는 "김일성 경기장에서 패배한다는 것, 그것도 남한에게 패배한다는 건 북한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북한 축구가 워낙 약체이기 때문에 중계하지 않고, 관중도 동원하지 않으리라고 탈북민들은 예상하고 있었다"고 했다. 북한은 2005년 3월 ‘독일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 이란에게 0대 2로 진 뒤로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린 공식 국제 경기에서 14년 넘게 무패(無敗)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③체육절 70주년 이틀 뒤 남북 대결…"축구 지면 최고 존엄 얼굴에 X칠"
경기 시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혔다. 남북전이 치러지기 이틀 전이었던 지난 13일이 북한의 체육절(매년 10월 두번째 일요일) 7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체육강국 건설’을 강조했고, 올해 북한 선전매체들은 북한 체육이 세계적 강국으로 우뚝 섰다며 선전해왔다.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던 체육절 이틀 뒤에 열린 경기에서 ‘패배’는 곧 ‘최고존엄’ 김정은에 대한 문제로 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태영호 전 주영 북한공사는 전날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 전문 강좌 행사에 참석해 남북 축구 경기를 "여러 사람 목숨을 살린 경기"라고 평가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의 체육절 이후 치러진 축구 경기에서 졌다면 ‘최고 존엄’ 얼굴에 X칠하는 것"이라며 "무승부 경기로 김정은도 살고, 북한 축구 관계자들을 살렸고, 북한 선수들을 살렸고, 우리 축구 대표팀도 살렸다"고 했다.

이날 귀국한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북한의 선수들이 거칠었다"고 말한 것도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손흥민은 이날 오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취재진을 만나 "우리 선수들이 다치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너무 큰 수확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경기가 거칠었다"고 전했다. 또 "심한 욕설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최정훈 자유수호연합 대표는 "기본적으로 북한은 친선경기조차 남한은 무조건 이겨야 된다고 ‘사상교육’을 받는다"며 "스포츠가 아니라 ‘전쟁’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축구 대표팀 손흥민이 북한과의 경기를 마치고 17일 새벽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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