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1만원짜리 조국 티셔츠

최보윤 문화부 차장
입력 2019.10.10 03:12
최보윤 문화부 차장
중국 문필가 주쯔칭(朱自淸)의 수필 '아버지의 뒷모습'은 수도 베이징으로 유학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철로 건너 귤을 사오겠다는 아버지는 뚱뚱한 몸으로 뒤뚱뒤뚱 기어오르듯 플랫폼에 오른다. 할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실직으로 힘겨워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렵게 사온 귤 꾸러미를 손에 쥐여 주고는 떠나간다. 수필 속 아버지의 부정(父情)은 많은 사람이 가슴에 새긴 자신의 아버지와 겹쳐질 것이다.

지난 주말 서초동 집회에 나온 '조국 티셔츠'도 그런 감성의 아버지를 소환하려는 듯 보였다. 조국 장관이 딸에게 줄 케이크를 사 들고 집으로 들어서다 찍힌 뒷모습을 그림으로 찍어낸 상품이다. 연출이라는 의혹이 일었던 그 사진이다. 가족들이 검찰 조사를 받는 와중에 조 장관이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으로 잠시 바꿔놓았던 모습이기도 했다. 법과 정의에 따른 원칙과 신념을 보여줘야 할 법무장관이 지지자들에게 감성적인 신호 보내기에 앞장선 것이다. '나는 조국이다(I am Cho Kuk)' 티셔츠는, 앞면엔 'I am' 글자와 뒷모습 그림이, 뒷면엔 '조국 수호자(guardian of motherland)'가 적혀 있다. 장엄해 보이는 영어 문구까지 곁들이니, 변종 인간 사이에서 유일하게 인간으로 살아남은 주인공을 그린 영화 '나는 전설이다' 포스터가 언뜻 떠오른다. 케이크 대신 개 한 마리를 끄는 게 차이다.

지지자들의 결속을 다지는 데 슬로건 티셔츠만큼 값싸고 효과적인 것은 없어 보인다. 영국 디자이너 캐서린 햄넷은 1984년 당시 마거릿 대처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58%는 퍼싱(핵탄도 미사일)을 반대한다'는 티셔츠를 입어 패션계 역사를 새롭게 썼다. 햄넷은 "문구는 멀리서 읽을 수 없지만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신뢰가 훼손됐는데도 감성적으로 신성시하는 극단적인 태도는 '무조건 그를 믿어'라는 배타적 신념을 키워내는 도구가 될 뿐이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신성한 가치를 위해 뭉치는 능력은 인간이 유일하지만, 그 뭉침이 모든 걸 선과 악으로 분리해 보게 하고, 결국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고 주장했다.

길거리에서 '아이돌 굿즈(goods)'처럼 매대에 오른 조국 티셔츠를 보니 가격표가 눈에 띄었다. 이미지 원작자가 상업적 판매를 금지해달라 요청했다는데, 해외에선 최대 42.95달러, 국내 온라인에선 2만~3만원이었던 것이, 집회 현장에선 1만원에 팔렸다. 수익금 일부는 서초동 집회를 주도한 '개싸움국민운동본부(개국본)'에 기부한다고 했다. '개싸움' 와중에 나라는 갈라졌고 경제는 추락했으며, 누군가는 '영웅'이라 착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돈을 벌고 있었다.


조선일보 A34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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