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對北 '희망 사고'

안용현 논설위원
입력 2019.10.08 03:16

작년 12월 청와대 앞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처음 만나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 무렵 문 대통령은 순방 비행기에서 "김정은 위원장 답방을 두고 국론 분열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며 "모든 국민이 쌍수로 환영해 줄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좌파 단체들은 김정은을 '위인'이라 칭송하고 나섰다. '가까운 시일 내 답방할 것'이란 김정은의 9월 약속이 이뤄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김정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올 초 하노이 회담 결렬 30분 전까지 청와대는 "대통령이 참모들과 함께 (미·북) 서명식을 시청한 뒤 입장을 내겠다"고 밝혔다. 회담 성공 후 남북 경협 확대에 대비해 안보실 차장을 통상 전문가로 바꾸기도 했다. 회담장 안에선 이미 협상이 깨졌는데 우리 TV들은 '장밋빛' 남북 쇼를 그리고 있었다.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 통에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희망 사고(思考)'에 빠졌다고 한다. 이 정부의 대북 굴종이 바로 희망 사고에 빠진 결과일 것이다.

▶하노이 이후 북은 돌변했다. 김정은은 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 그만하라"고 했다. 이후 "겁먹은 개" "삶은 소대가리" "바보" "맞을 짓 말라"는 등 막말을 쏟아냈다. "남조선에 보내는 경고"라며 탄도미사일만 10차례 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독일 일간지에 "한반도의 봄이 성큼 왔다"고 썼고, 트럼프·김정은의 판문점 회동 직후에는 "사실상 적대 관계 종식을 선언했다"고 평가했다. "남북 경협으로 일본을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다"고도 했다. 현실을 못 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딴 세상을 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국정원장이 최근 국회에서 '미·북 실무회담에 따라 김정은이 11월 부산 아세안 정상회담에 참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1986년 짐바브웨 비동맹 회의 참석을 위해 호텔까지 예약해 놓고도 막판에 취소했다. 1인 신정(神政) 체제에서 '신변 안전'이 문제였다. 김정은이 다른 곳도 아닌 한국에 올 용기가 있을까. 비핵화 사기극을 벌이는 그에게 우리 국민이 거센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그제 미·북 실무회담이 결렬되면서 청와대의 희망 사고는 또 한 번 된서리를 맞았다. 청와대도 김정은이 핵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적당히 물러서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그게 희망대로 잘 안 되고 있다. 그래도 문 대통령은 김정은 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 쇼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다는 유혹이 너무 크다.


조선일보 A30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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