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걸고 지킨 말모이… 다시 더 모아 "우리 말과 글에 힘을"

김성현 기자 백수진 기자
입력 2019.10.07 03:00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1] 말모이, 조선어학회, 조선일보

주시경이 시작한 '말모이'… 장지영이 그 정신 이어받아 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으로
조선어학회 33인의 희생, 그들 기린 '한말글 수호탑'은 시민들 모르는 곳에 외로이…

"형사들은 조금만 말이 엇갈리면 무조건 달려들어 마구 때리는데, 한번 맞고 나면 한 보름씩 말을 못하였다. 몽둥이건, 죽도건, 손에 잡히는 대로 후려갈기니 양쪽 귓가가 찢어졌다."

서울 세종로 공원엔 사람들이 잘 모르는 탑이 오도카니 서 있다.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탑'. 10m 높이의 탑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4년간 옥고를 치른 이인 선생의 옥중 고문기가 적혀 있다. 1942년 일제의 조선어학회 탄압 사건으로 투옥된 33인을 기리기 위해 2014년 세워졌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서울청사 사이의 작은 공원엔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탑이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투옥된 33인의 이름을 새긴 수호탑 앞을 대부분 시민은 모르고 스쳐 지나간다. 지난 1일, 광화문이 축제로 떠들썩한 가운데 조선어학회 33인 유족과 한글학회 회원들이 모여 탑 앞에 꽃을 바쳤다. 77년 전 10월 1일은 우리말 사전을 만들다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제에 끌려간 날이었다. /고운호 기자
매년 10월 1일 이곳에선 조촐한 헌화식이 열린다. 지난 1일에도 한글 단체 회원들과 유족 20여 명이 모여 조용히 꽃을 바쳤다. 33인의 한 명인 신현모 선생의 아들 신광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금 한국어와 한글이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그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은 목숨 걸고 우리 말글을 지킨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라며 "한 나라의 정신을 지킨 말글 수호 운동도 3·1운동, 항일무장투쟁 못지않게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이라고 했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 선생이 1911년 시작한 '말모이' 편찬 작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말모이가 완성되기 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자 그 유지를 이어받은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뒤 대대적인 사전 편찬에 나섰지만, 일제 탄압에 중단된다. 사라졌던 2만여 장의 말모이 원고는 광복 후 서울역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됐고, 1957년 6권의 조선말큰사전으로 완간된다.

1929년 1월 1일 자 조선일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된 국어학자 중 한 명인 장지영 선생은 조선일보 편집인으로 취임해 ‘우리 말과 글에 힘을 들이자’는 글로 문자보급운동을 선포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민족지들도 우리말·글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조선어연구회 창설 멤버인 장지영은 조선일보 편집인으로 '문자보급운동'을 진두지휘했다. 1929년 신년호에 '새해에는 우리 말과 글에 힘을 들이자'는 글로 문자보급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는 훗날 "이 일을 맡은 3년 동안 전국에 안 간 곳이 없게 되었으며 글을 깨쳐 신문을 읽게 된 사람이 30만명이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1931년 동아일보도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란 이름으로 문맹퇴치운동에 나섰다.

조선일보는 매년 한글날 관련 기사도 대서특필했다. 1933년 한글날에는 1면에 붓으로 쓴 '우리 명절 한글날'이란 문구를 크게 넣고 한자(漢字)를 전혀 쓰지 않은 사설을 게재했다. 국어학자 최현배는 1938년 조선일보 향토문화조사단원이 되어 '시골말 캐기'를 주도하고, 신문 가로쓰기를 제안했다. 손자인 최홍식 세종대왕기념사업회장은 "영화 '말모이'에 나오듯 할아버지는 각 지방을 돌며 사투리를 모으고, 집집마다 들러 붓글씨로 한글 가훈을 써주셨다"고 추억했다.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 사전 편찬을 위해 수집한 우리말들을 잔뜩 모아 놓은 지하 창고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내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가 펼치는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운동은 우리말·글을 목숨 걸고 지킨 선현들의 얼을 다음 세기로 이어가는 여정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일제 때 말과 글을 빼앗기고 우리도 모르게 한자말에 잠식돼 세 살부터 어머니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배운 우리 귀중한 바탕말이 사라져가고 있다"며 "방언뿐 아니라 우리가 한자어 대신 써온 입말, 순수한 정서를 나타내는 옛말, 젊은이들이 새로운 의미로 쓰는 단어들까지 모으면 미래의 100년 동안 쓸 언어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A4면
말모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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