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 향 스치는 메기의 추억, 표백된 도시 지우는 들녘의 맛

정동현
입력 2019.10.05 03:00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민물매운탕집편

서울 수표동 '동강나루터'

충청도 음성 시골에 가면 땡땡 소리 나는 자전거를 끌고 할아버지가 동네 입구 서낭당까지 나와 있었다. 일본강점기 유도선수였던 할아버지는 일흔이 넘어서도 허리가 굽지 않았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생과 나는 정정한 할아버지를 쫓아 산과 강을 돌아다녔다. 산에서는 칡덩굴을 헤치며 꿩을 쫓고, 강에서는 갈대숲을 누비며 붕어와 메기를 노렸다.

할아버지는 사냥감이 앞에 보이면 유격 조교처럼 엄격해졌다. 특히 강에서 그물을 들고 강바닥을 훑을 때면 과연 이것이 손자와 할아버지의 관계인가 의문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밟아!"라고 하면 동생과 나는 그물 양옆 갈대 밑을 마구 밟아댔고 그러면 숨어 있던 물고기가 놀라 그물로 들어오기를 바랐다. 갈대에 종아리가 뻘겋게 스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도 이게 뭐 하는 건가 회의가 들다가도 눈을 껌벅이는 붕어 몇 마리가 그물에 들어오면 "따봉"을 외치며 웃었다.

서울 수표동 ‘동강나루터’ 참게메기매운탕.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몇 시간 강바닥을 헤매다 붕어 몇 마리, 피라미 몇 마리 양동이에 담아 집으로 가면 할머니는 쯧쯧 혀를 차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면 하얀 밥에 빗물 닮은 냄새가 나는 매운탕 한 그릇이 앞에 놓였다. 작은 손으로 잔가시 살살 발라가며 살을 골라냈다. 빨간 국물을 떠서 밥에 비비고 오이지를 올렸다. 모든 것이 비워지면 스테인리스 밥공기에 차가운 물을 따라 마셨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됐지만 싸늘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면 그 시원한 국물이 자주 떠오른다. 반딧불이 별처럼 반짝이고 하늘이 가까운 전북 무주에 가면 예전처럼 매운탕을 파는 곳이 몇몇 있다. 그중 무주군청 근처 '금강식당'은 1987년 영업을 시작한 곳으로 특히 어죽이 유명하다. 돈을 더 내면 쏘가리탕, 메기탕 같은 것을 청할 수도 있지만 시골에서는 오히려 단출한 음식이 더 만족스러울 때가 많다.

큰 냄비에 온갖 물고기를 쏟아 붓고 펄펄 끓인 뒤 남은 밥을 쓸어 모아 걸쭉하게 끓여낸 어죽은 경기도 남양주 외갓집에 가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운이 좋으면 외숙모가 던져 넣은 수제비가 숟가락에 걸렸고 운이 나쁘면 생선 가시만 가득했다.

금강식당은 옛날 외갓집에서 먹던 어죽보다 고기가 더 실하게 들었고 국물 위에는 들깻가루가 소복이 올랐다. 점심때 이르게 가면 동네 여인들이 모여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객이 주문을 넣으면 손님처럼 앉아 있던 아낙 하나가 주방에 들어가 어죽을 푼다. 햇볕에 말린 고춧빛 국물은 생각만큼 맵지 않다. 대신 몽글몽글한 가을 햇살을 닮아 속을 따스히 풀고 배를 오래 채운다.

멀리까지 가지 않고, 무슨 무슨 산성까지 차를 몰지 않고 민물 매운탕 맛을 보고 싶다면 파랑새처럼 가까운 곳에 답이 있다. 을지로2가 사거리에서 지척인 수표동 '동강나루터'는 그 답을 찾은 사람들이 매일 가스버너 파란 불을 켠다. 탕 메뉴는 참게메기매운탕 하나뿐이다. 붕어나 피라미 매운탕처럼 가시 발라낼 걱정이 없다.

인분 수대로 주문을 넣으면 걸음 바쁜 종업원이 커다란 냄비 하나를 놓고 간다. 이제 불을 올리고 수북이 쌓인 미나리가 숨 죽기를 기다린다. 그사이 잘 삭은 열무김치, 갓김치, 파김치에 젓가락질을 하다 접시를 다 비우게 된다. 신맛이 속까지 밴, 서울 시내에서 보기 드문 김치다.

매운탕 국물은 물고기뿐만 아니라 참게를 같이 넣어 자글자글 혀를 간질이는 단맛이 돈다. 도톰한 메기 살에는 황토 향이 살짝 스친다. 표백된 도시의 무표정이 아니라 산이 바람에 흔들리고 강이 땅을 휘감는 들녘의 그리운 냄새다. 서해로 떨어지는 노을처럼 짙은 적색의 국물을 마시며 따로 시킨 미꾸라지, 굴·새우 튀김을 곁들인다. 서울이란 크고 깊은 숲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매운탕 한 자락에 복작복작 시간을 보낸다. 저들이 보내온 추억이, 이 땅의 기억이 묵직한 국물에 실려 몸에 다시 스며든다.

조선일보 B6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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