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두 살 할아버지가 반말을 했다, 기분이 좋았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9.09.28 03:00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 이철원
백 살의 나이 때문일까. 만나는 사람들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어 난처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짐작한 나이보다 후하게 주어도 꼭 학생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얼마 전 일이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갈 일이 생겼다. 자리를 겨우 잡고 앉아 있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한 노인이 두 손에 지팡이를 짚고 올라탔다. 목에 작은 손가방을 매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자리를 양보해야겠기에 "할아버지 여기에 앉으세요" 하면서 뒷자리로 옮겨 갔다. 할아버지는 앉으면서 "고마워"라고 인사했다.

남산 순환도로에서 내가 내리려고 하는데, 앞자리 할아버지도 지팡이 두 개를 짚으면서 일어서는 것이다. 내가 "조심하세요"라고 붙들어 주면서 함께 내렸다. 허리가 많이 앞으로 굽어 있었다. "이렇게 혼자 다니셔도 괜찮으세요?" 물었더니 "저 골목까지 가면 딸이나 손녀가 마중 나올 거야" 했다.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했다. 힐끗 내 얼굴을 쳐다보며 "나 금년에 아흔둘이야"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먼저 옆으로 돌아서면서 "할아버지 조심해서 걸으세요.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요"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도와줘서 고마워"라면서 네 발 걸음으로 떠나갔다.

혼자 가면서 생각해 보았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아래인 할아버지가 나를 손아랫사람으로 대한 것이다. 약간 억울하기도 하고 손해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팡이가 필요 없는 내가 더 고맙기도 하고.

나이 때문에 꼭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한번은 집 가까이에 있는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맞은편 입구로 여대생 네 명이 제각기 악기를 들고 얘기하면서 들어섰다. 그중에서도 나이가 어려 보이는 한 학생이 악기를 내려놓자마자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해맑은 음성으로 "혹시 ○○○ 교수님 아니세요?" 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나는 속으로 나이 많아야 대학원생쯤으로 보이는데 '약간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옆에 앉으라는 말도 없이 "네~" 하고 인사를 받았다. 그제야 그 여학생은 좀 미안했던 모양이다. 돌아가더니 명함을 가지고 다시 왔다. S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으로 되어 있었다. 약간 당황스러웠다. "나는 학장직을 못 해봤는데, 나보다 더 훌륭하시네요" 웃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S대학 학생들을 위해 강연을 해주기도 하고 두 차례 음악회에 초대받기도 했다.

며칠 전 일이다. 다시 만나는 기회가 생겼다. 내가 명년에 만 백세가 되기 때문에 기념관이 있는 강원도 양구 분들을 위해 음악회를 개최하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협조해 주겠다는 고마운 약속을 받았다. 나보다도 양구 여러분에게 음악회를 선사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연한 만남이 아름다운 열매를 거둔 셈이다.

조선일보 B2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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