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숨는 자가 범인이다"

서유근 사회부 기자
입력 2019.09.23 03:12
서유근 사회부 기자
지난 19일 오전 7시 부스스한 머리의 작업복 차림 남성이 서울 서초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2층 사무실을 혼자 지키고 있었다. 그는 요즘 한인섭 형사정책연구원장을 위해 새벽 출근하는 날이 잦다. 임무는 취재진을 피하려는 한 원장의 '도둑 출근'을 돕는 일이다. 어떤 날엔 오전 6시에 등산복·반바지 차림으로 나와 기자들이 있는지 '망'을 보기도 했다.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남자는 "요즘 일이 많다"고 했다.

한 원장은 2013년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장을 하던 당시 고교생이던 조국 법무장관 자녀를 위해 서울대 인턴증명서 발급을 지시한 의혹을 받는다. 당시 공익인권법센터 관계자가 지난 9일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한인섭 교수님이 지시해서 (인턴)예정증명서를 만들어줬다"고 밝힌 뒤로, 한 원장의 도둑 출근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휴가'를 썼고, 사태가 길어지자 출근은 하면서도 부하 직원들을 동원해 기자들과 숨바꼭질을 벌였다. 오죽하면 일부 직원 사이에서는 "한 원장이 퇴근할 때 작업복을 입고 안경을 바꿔 쓰는 등 변장한 채로 나간다"는 소문까지 나올 정도다. 한 원장의 일정과 동선을 알 만한 직원들은 당일 일정이나 출근지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다.

한 원장은 정부 출연 연구기관장이다. 국가의 돈으로 대여한 고급 승용차를 관용차로 이용해 출퇴근하는 공인이다. 공인은 본인에 대한 의혹에 쏟아지는 국민적 관심에 해명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한 원장의 모든 동선과 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죄 없는 연구원 직원들이 그를 위한 '기자 교란 작전'의 도구로 활용된다. 장관 등 다른 고위공무원, 심지어 대통령도 이렇게는 안 한다.

상사의 개인적인, 그것도 그의 이전 직장에서의 비위 의혹 때문에 동원된 이들은 어떤 심정일까. 물어봤다. 한 직원이 "임무가 달라 (기자와) 서로 부딪히지만, (의혹 제기에 대해)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한다"며 "너무 힘들어 얼른 이 사태가 끝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또 다른 직원은 기자에게 조용히 다가와 "잃어버린 공정과 정의를 되찾아달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기관의 장이 자신과 법무장관의 개인적 의혹을 덮기 위해 직원들을 사적으로 동원하는 행위는 직권남용죄 소지도 있다.

한 원장 아내는 20일 '도둑 출퇴근'이란 본지 표현에 강력 항의했다. "한 원장은 60 평생을 고결하게 살아온 학자다. 늘상 새벽까지 연구에 매진하는 학자를 도둑이라고 하느냐"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떳떳하게 국민 앞에 해명하는 게 맞지 않을까. "숨는 자가 범인이다." 참여연대 출신 '고결한 학자'를 연구기관장으로 임명한 정권 사람들이 했던 말이다. 더는 직권남용으로 직원을 괴롭히지 말라.


조선일보 A30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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