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文, 트럼프 만나 김정은 대변인 역할 할 건가

입력 2019.09.23 03:20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3년 동안 이 나라(미국)에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은 내가 김정은과 매우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오랫동안 김정은은 핵실험을 하지 않았다. 일부 단거리 미사일들을 발사하긴 했지만, 이는 모든 다른 나라들이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트럼프식 셈법으로는 지금까지의 미·북 관계가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2017년 11월 이후 미 본토를 위협하는 ICBM 시험을 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이를 토대로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나는 미국의 안전을 지켜냈다"고 자랑할 수 있었다. 북이 핵실험을 하지 않은 것은 이미 핵무력 완성을 선언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만 트럼프에게 이는 중요하지 않다.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북한 김씨 일가와 마주 앉는 것을 넘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는 쇼까지 연출하며 미국 유권자들과 세계의 이목도 끌었다. 심지어 북한서 체포당하고 돌아와 사망한 웜비어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전직 대통령을 비난하지 김정은의 책임은 말하지 않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김정은 쇼'를 하는 데만 온 정신이 팔려 있다.

하지만 그동안 한반도 안보는 어떻게 됐나. 북은 최근 몇 달 새 "남한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며 한반도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신형 탄도미사일·방사포를 10차례 발사했다. 고체연료, 이동식발사대(TEL)를 기반으로 해 기동성과 은밀성이 대폭 강화된 데다, 궤도가 복잡하고 방향 조정이 가능한 이스칸데르급 미사일은 우리 군의 요격 체계를 무력화시킬 만큼 위협적이다. 우리 군의 정찰·탐지 능력은 9·19 남북 군사 합의로 심각한 구멍이 뚫렸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스스로 파기했다.

한·미 동맹의 기둥이었던 키리졸브, 독수리 훈련, 을지프리덤 가디언 등 3대 연합훈련은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거치며 사실상 폐지됐다. 중국·러시아는 우리 방공식별구역을 제집 안방처럼 넘나들다 영공까지 침범했다. '미·북 중재자, 촉진자'라던 우리 정부는 북한으로부터 '겁먹은 개' '삶은 소대가리'라는 막말을 듣고 무시당해도 한마디도 못했다. 트럼프는 미사일은 "미국 위협 아니니 괜찮다"고 하고 군사훈련은 "완전한 돈 낭비"라며 동맹을 모욕주고 북한편을 들었다.

지금 북핵을 둘러싼 협상 구조는 김정은에게 최고의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트럼프와 문재인 대통령 모두 선거를 앞두고 김정은 쇼에 목말라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달래 핵실험과 ICBM 발사를 막고 '적당한' 핵 합의로 치적 자랑을 하려 할 것이고 문 대통령은 이를 막는 것이 아니라 부추겨 남북 쇼 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이제 미 행정부 내에서 트럼프의 위험한 거래에 제동을 걸 사람도 얼마 남아 있지 않다. 트럼프가 전부 아닌 일부분의 북핵 시설의 신고·사찰과 대북 제재 해제를 맞바꾸면 한국민은 북핵 인질 처지를 숙명으로 안고 살아가야 한다.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방미하는 문 대통령이 김정은 대변인이 돼 북핵 기정사실화를 돕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조선일보 A31면
말모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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