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민주주의, 왕 대신 은행이 돈을 찍으면서 시작됐다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입력 2019.09.21 03:00

물물교환은 돈의 일부 기능일뿐… 중국에선 통치와 반란의 도구
유럽선 다양한 화폐 철학 등장해 영국 의회 민주주의 잉태하기도
돈은 사회를 조직하는 기술, 21세기 화폐의 역할 고민해야



펠릭스 마틴 지음|한상연 옮김|문학동네
416쪽|1만8000원

원시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화폐는 소였다. 소금이나 조개껍데기도 물물교환 수단으로 쓰였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말린 대구를 화폐로 쓰는 곳에서 말린 대구를 파는 어부가 물건값으로 말린 대구를 받는다면?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조차 이런 맹점에 대한 고민 없이 '다양한 상품이 다양한 장소에서 화폐로 선택된다'고 봤다. 그런데 20세기 초 태평양 오지의 외딴섬 야프에서 돈의 기능을 되묻게 하는 화폐가 발견됐다. 가운데 구멍이 뚫렸고 페이(fei)라는 이름을 가진 지름 30~360㎝의 이 둥근 돌은 물건 값을 치르는 용도로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섬사람들은 매매 증거로 페이의 소유권만 넘길 뿐 그걸 가져가진 않았다. 그 섬의 엄청난 부자가 가진 페이는 심지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다. 너무 무거워 꺼낼 수도 없지만 섬사람들은 이를 문제 삼지 않고 마치 은행 잔고쯤으로 여겼다. 돌은 물속에 잠긴 채 소유권만 바뀌었다. 말하자면 페이는 거래 수단이 아니라 이 섬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정산 시스템이었다. 사람들은 돌에 신용을 부여하고 그 신용에 기대어 물건을 매매했으며 때로는 이 신용을 타인에게 양도했다. 페이는 비록 투박한 돌이지만 완벽하게 현대적인 화폐 시스템이었다.

화폐를 물물교환 수단이 아닌 '양도 가능한 신용'으로 보는 것은 돈에 대한 관점 변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현직 금융인인 저자는 이 책에서 돈을 보는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면서 돈에 대한 견해가 바뀌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더 나아가 세상을 조직하는 방식의 변화를 부른다고 말한다. 저자는 돈에 얽힌 역사상의 흥미로운 사례들을 통해 시대마다 돈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고 바꿨는지 들려준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0월 영국 중앙은행 ‘잉글랜드 은행’ 앞에 모인 소상공인들이 거대 금융기업들에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말라며 시위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왕의 싱크탱크였던 직하학파 학자들은 주군에게 "화폐 유통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라"고 제안했다. 한나라 시절 오초칠국의 난은 이 가르침을 간과한 황제가 주화 주조권을 지방 제후에게 나눠줬다가 부른 재앙이었다. 이후 중국 역대 황제는 주화의 사적 주조를 금지했다.

반면, 유럽에서 화폐 통제권을 두고 벌어진 싸움은 시민 계급의 승리로 끝났다. 왕에게서 주조권을 빼앗고자 했던 시민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화폐 철학을 만들었다. '화폐는 군주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소유'라는 민주주의 사상이 싹텄다. 특히 무역업자들은 군왕의 화폐 독점권을 깨기 위해 자신들만의 신용 수단인 환어음 제도를 고안해 거래대금 정산에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환어음용 화폐단위 '에퀴 드 마르'는 국왕들을 환율의 포로로 잡아버렸다. 멋대로 통화를 남발했다간 환율 폭락이란 재앙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화폐는 공공의 소유란 인식이 영국에선 입헌군주제의 문을 열었다. 왕과 시민 계급이 합작 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한 데 이어 왕이 갖고 있던 주화 주조권을 은행에서 발행하는 은행권으로 대체하는 혁명적인 통화 조치가 단행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화폐가 부를 쌓고 분배하는 기능을 맡지만 공산주의에선 국가 계획국이 그 일을 한다. 당연히 돈이 설 자리는 없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이긴 스파르타는 패전한 도시국가들에 화폐 사용 중단을 요구했다. 볼셰비키 혁명 세력은 1919년 6월 "화폐를 전면적으로 폐지한다는 목표하에 화폐가 불필요한 제도를 확립하도록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계획 경제를 신봉하는 이들은 민간 자율로 화폐를 유통하는 시스템을 부도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례가 화폐는 단순한 거래 수단을 넘어 사회를 조직하는 기술(social technology)임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21세기 화폐로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 저자는 글로벌 금융 위기 사태, 그리스·아르헨티나의 국가 부도 위기, 빈부 격차로 인한 갈등의 심화 등도 결국 화폐를 보는 관점을 새로이 정립하고 운용 패러다임을 다시 짜는 것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책임을 국가에 전가해선 안 되고 화폐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나눠 져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조선일보 A19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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