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와 박찬욱, 그다음 주자가 없다

송혜진 기자 황지윤 기자
입력 2019.09.18 03:00

[한국 영화 100년의 그늘] [중] 차세대 감독은 어디에

2019년 한국 영화 상위 50편 중 손익분기점 넘은 작품은 14편뿐
예산 50억~60억 중소 영화 줄어
신인 감독에게 맡길 작품 없고 대기업은 숫자만 보며 작품 제작
"과거엔 감독·작가 능력 봤지만 이젠 안정적·대중적 상품만 추구"

"봉준호·박찬욱 다음이 안 보인다."

최근 영화계에 떠도는 말이다. 지난 5월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을 때만 해도 영화계는 달뜬 분위기였다. 그러나 여름 성수기가 썰렁하게 물러가고, 9월까지 개봉한 한국 영화 상위 50편 중 손익분기점을 넘은 작품은 고작 14편. 영화계 분위기가 어두운 이유다. 최근 '극한직업'을 만든 이병헌, '사바하'를 만든 장재현 감독 정도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감독의 작품도 확연히 줄었다. 몇년 전만 해도 '추적자' '곡성'의 나홍진, '늑대소년'의 조성희, '돼지의 왕' '부산행'의 연상호 같은 이름이 거론됐으나 최근엔 이 정도의 화제작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차세대 주자가 증발했다는 걱정이 나오는 이유다.

◇'메이저리거'만 찾다 신인 못 키워

최근 본지와 롯데시네마가 관객 2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영화감독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체감할 수 있다. 관객들에게 '좋아하는 한국 감독은 누구입니까'를 묻고 복수로 답을 적어내게 한 결과, 봉준호(25%)와 박찬욱(21%)만 많이 거론됐고, 그 외에는 이름이 나오는 횟수가 확연히 적었다. 류승완(12%) 이준익(10%) 나홍진(5%) 허진호(5%) 이창동(4%) 임순례(4%) 정도. 2000년대 이후 작품을 내놓은 차세대 감독들 이름을 추려서 다시 물었을 땐 이병헌(32%) 윤종빈(17%) 박훈정(14%) 엄유나(6%) 전고운(3%) 김보라(2%) 등이 거론됐다. 관객이 이름을 기억하고 작품을 찾아보는 우리나라 상업영화 감독이 많지 않음을 보여준다.

지난 8월 개봉해 179만명을 모으며 손익분기점을 넘긴 공포 영화 ‘변신’. 45억원을 들인 작은 영화지만 “무섭다”는 소문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 한물갔다는 여름 공포 영화 시장을 새로 연 데다, 차세대 감독의 소규모 상업 영화로 성공한 드문 사례로 꼽힌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신과 함께' 시리즈를 만든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처스 대표는 "신인 감독이 대중에게 각인될 상업영화를 만들려면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요즘은 그런 환경 자체가 조성되질 않는다"고 했다. "메이저리거만 데리고 야구를 하려는 상황이거든요. 천재성을 보여주는 마이너리거보다는 검증받은 메이저리거만 데리고 일하려고 하는 거죠."

2~3년 전부터 300만~500만명이 보는 '중박' 영화가 사라지다시피한 것, 50억~60억원대 정도 예산으로 만드는 중소 규모의 영화를 갈수록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도 큰 문제. 젊은 감독에게 맡길 영화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 영화 수익률은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추산한 지난해 우리나라 상업영화 수익률은 -17.3%. 줄곧 흑자였던 상업영화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곤두박질 친 건 2011년 이후 처음이다.

◇'숫자 놀이 영화'의 배신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실력 있는 제작자가 영화판에서 사라진 것도 또 다른 원인으로 꼽힌다. 가령 '플란더스의 개'로 흥행에 실패했던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당시 우노필름(싸이더스의 전신)의 차승재 대표가 있었기 때문. 차승재 현 부산영화제 마켓운영위원장은 "과거엔 정성적인 평가, 즉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능력과 잠재력, 그들의 개인적 역량과 취향 등을 보고 차기작을 밀어붙이는 제작자들이 있었지만 대기업이 영화판에 뛰어들면서 이젠 숫자 분석만이 남았다"고 했다. 영화가 실패했을 때의 책임을 떠안지 않기 위해 여러 명이 기존의 흥행 데이터를 분석해 차기작을 기획하고 만드는 시스템이 굳어진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 차 위원장은 "홍콩 영화가 그렇게 상품을 쏟아내다 결국 망했다. 한 나라의 영화 산업이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라고 했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 역시 "1990년대엔 창작자의 재능과 모험심을 존중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젠 정말 대중적인 작품만 추구하는 분위기가 됐다"고 했다. 문제는 그렇게 만든 영화조차 우리 대중이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심 대표는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수혈받으려는 곳이 없다. 한국 영화계가 경직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A21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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