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이해 안 되는 대통령의 해명

곽수근 사회정책부 차장
입력 2019.09.18 03:15
곽수근 사회정책부 차장

'정부 뭐 하냐? 똑똑히 해라'(2006년 국민경제자문회의 중) '되게 하는 지혜를 모아보자'(2003년 대통령 주재 시도지사 회의 중) ….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에 남긴 친필 메모 266건이 공개됐다. 정상회담을 비롯해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정부 부처 업무 보고 등에서 노 전 대통령이 메모지에 직접 쓴 글로, '언론과의 숙명적인 대척'(2007년 수보 회의) 등 대통령의 심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처럼 대통령과 청와대 등 보좌·자문 기관이 생산한 공공 기록물 등을 영구 관리하는 기관이 '대통령 기록관'(Presidential Archives)이다.

정부가 예산 172억원을 들여 문재인 대통령 기록관을 열려고 내년 예산안에 편성한 사실이 본지 보도로 밝혀지자, 문 대통령은 "왜 우리 정부에서 시작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변인은 "대통령께서 당혹스럽다고 하면서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도 했다.

왜 측근들이 대통령 기록관을 추진해 문제를 일으켰는가는 이 기록관이 문 대통령에게 갖는 남다른 의미를 들여다보면 조금 이해가 된다. 지금 세종시에 있는 '통합 대통령 기록관'(2016년 개관)은 노무현 정부 때 추진이 결정됐다. 역대 대통령 기록물을 통합 기록관에서 관리할지, 대통령별로 개별 기록관에서 관리할지 논의하다 통합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 대통령 기록을 담은 하드디스크 사본을 자기가 사는 봉하마을로 가져가 불법 반출 논란이 벌어졌다. 노 전 대통령이 자기 기록을 편리하게 열람하고 활용하겠다며 대통령 기록물 76만9000여 건을 복제한 저장 장치와 서버 등을 가져간 것이다. 당시 문재인 비서실장이 기록물 이관 등을 총괄했다. 2013년 문재인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기록물 때문에 검찰 조사까지 받았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발언이 담긴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원본이 대통령 기록관에서 삭제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초(史草) 실종'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당사자가 문재인 대통령이었던 셈이다.

재작년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여당(민주당)은 개별 대통령 기록관 건립 기준을 완화하는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별 기록관을 건립하면 봉하마을 건처럼 전임 대통령의 대통령 기록물 반출이 합법화된다. 행정안전부는 연구 용역을 작년 7~11월에 끝냈다. 행안부는 올해 1~3월에 청와대와 개별 대통령 기록관 건립에 대해 협의했고, 행안부 차관과 장관 보고를 차례로 거친 뒤 국무회의에서 관련 예산안을 의결했다.

이처럼 정부가 국정 과제로 1년 넘게 착착 진행해온 사안을 대통령이 몰랐다고 펄쩍 뛰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묻는데 대통령이 대로(大怒)로 서둘러 입을 막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국민이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A30면
말모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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