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뜬 드론 10대, 사우디 석유의 급소 2곳 동시 폭탄공격

파리=손진석 특파원
입력 2019.09.16 03:07

아람코의 세계최대 석유단지, 사우디서 두번째 큰 유전 '쑥대밭'
트럼프·빈살만 왕세자 긴급 통화… 美 폼페이오 "이란이 한 일"
사우디, 예멘내 반군 근거지 공습… 반군 "석유시설 추가 공격"

어둠이 걷히지 않은 14일 오전 4시(현지 시각) 페르시아만에서 가까운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브카이크 석유 단지에 여러 대의 드론이 접근했다. 순식간에 폭탄을 투하하며 아브카이크 단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커다란 화염과 엄청난 연기가 뿜어져 나와 위성사진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세계 최대 석유회사 아람코가 자랑하는 아브카이크 단지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다. 아브카이크 단지는 사우디 각지의 유전에서 모은 원유를 수출하기 전 탈황(유황 제거) 작업을 하는 곳이다.

같은 시각 수도 리야드 동쪽에 있는 사우디에서 둘째로 큰 아람코 소유 유전(油田)인 쿠라이스 유전도 드론 공격으로 쑥대밭이 됐다. 두 곳 모두 불길이 2시간 만에 잡혔고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우디 석유 산업의 핵심인 아브카이크 단지와 쿠라이스 유전은 당분간 가동이 불가능하게 됐다.

◇드론으로 순식간에 원유 공급 젖줄 강타

이번 사건으로 미국의 우방이자 세계 원유 공급의 젖줄인 사우디의 핵심 석유 시설이 드론을 이용한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브카이크 석유 단지와 쿠라이스 유전이 가동 중단되면서 세계 석유 공급량의 5%인 하루 570만배럴의 원유 생산이 차질을 빚게 됐다. 컨설팅기업 IHS마킷의 로저 디완 부사장은 "아브카이크는 사우디 석유 생산 시스템의 심장부이며, (드론 공격으로) 심장마비가 온 것"이라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인공위성이 찍은 시커먼 연기 - 세계 최대 석유 회사인 아람코가 보유한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아브카이크 석유단지에서 14일(현지 시각) 드론 공격으로 불이 나면서 발생한 검은 연기가 미국 민간 위성업체 ‘플래닛 랩스’가 촬영한 위성사진에 선명하게 찍혀 있다. 아브카이크의 석유단지는 단일 석유 시설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AP 연합뉴스
이번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고 밝힌 예멘의 후티 반군은 이란과 군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슬람 종파 중 시아파 국가인 이란이 같은 시아파 계열인 후티 반군에 무기를 공급하며 앙숙인 수니파 국가 사우디를 견제하고 있다. 과거 후티 반군은 종종 미사일을 사우디의 석유 시설로 발사한 적이 있었지만 심각한 피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드론을 이용한 공격에 사우디의 핵심 석유 단지가 무방비 상태라는 점이 노출되면서 중동 정세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란이 막대한 군사력 투입이 필요한 호르무즈해협 봉쇄보다 드론이라는 소규모 군사 자원으로 급소를 가격해 사우디와 세계 석유시장을 위기에 빠뜨리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RBC캐피털마켓은 "이번 공격이 일회성이 아니며, 후티 반군이 사우디에 대한 추가적인 드론 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드론 공격을 받은 14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통화에서 "테러분자(후티 반군)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겠다"고 했고, 사우디 공군은 이날 바로 후티 반군의 예멘 내 근거지를 공습했다.

◇후티, 1500㎞ 날아가는 드론 보유

이번 공격에 사용된 드론의 구체적인 제원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아브카이크 단지가 예멘 국경에서 800㎞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긴 거리를 항속할 수 있는 고성능 드론을 가동시킨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작년부터 후티가 군사용 드론을 실전 배치했다는 관측이 나왔고, 유엔은 올해 1월 후티가 1500㎞를 한 번에 날아갈 수 있는 'UAV-X'라는 이름의 드론을 보유했다는 보고서를 냈다.

미국 정보기관은 이란이 드론 전문 엔지니어들을 예멘에 파견해 드론의 조립, 운영, 수리에 대해 훈련을 시켜온 것으로 보고 있다. 네덜란드에 본부가 있는 반전단체 팍스(PAX)는 "고성능 드론을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하는 후티 반군의 기술력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사우디를 공격한 드론은 대당 1만5000달러(약 1800만원) 안팎으로 보인다"고 했다.

◇미국, 이란을 공격 주체로 규정

이번 공격으로 인해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다시 고조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對)이란 강경파인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난 10일 경질했는데, 이는 이란 핵 문제를 둘러싼 협상을 두고 미국이 전향적인 태도로 돌아선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란과 한 몸처럼 움직이는 후티 반군이 미국의 핵심 우방인 사우디를 공격함에 따라 미국과 이란의 화해 가능성은 낮아졌다. 미국이 이란을 더욱 압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번 공격이 예멘에서 비롯됐다는 증거가 없다"며 이란이 주도적인 공격 세력이라고 몰아붙였다. 일부 중동 언론들도 드론이 남쪽 예멘 방향이 아니라 북쪽 이라크 방향에서 날아왔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드론이 이라크나 이란에서 직접 날아왔을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 외무부는 15일 성명을 내고 이란이 배후라는 미국 주장에 대해 "헛된 비난"이라고 반박했다.

[시아파 맹주 이란, 수니파 사우디 견제 위해 예멘 반군에 무기 공급해와]

반군, 정부 밀어내고 사실상 통치

후티 반군은 예멘의 무장 단체다. 2004년부터 예멘 정부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으며 2015년 수도 사나를 장악하고 예멘 정부를 지방으로 밀어낸 이후 실질적인 통치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슬람 종파 중 소수파인 시아파에 속하며, 시아파 맹주로 통하는 이란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다. 후티는 이란산 무기로 수니파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를 공격하고, 사우디는 같은 수니파로 우방인 예멘 정부를 돕기 위해 후티를 공격하며 대치 중이다. 이슬람 양대 종단 중 수니파가 전체의 90%이지만 시아파는 이란, 시리아, 후티, 헤즈볼라(레바논 무장 세력) 등이 동맹을 맺고 있어 군사적으로는 수니파에 밀리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 A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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