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강사→대리기사→작가… 이젠 '정미소'를 차렸습니다

곽아람 기자
입력 2019.09.16 03:00

김민섭, 시간강사 실태 고발한 '지방시' 출간 후 동료 강사들 공격 심해져
대리기사 하며 1인 출판사 차려… 입시제도·性소수자 다룬 책 기획
"볍씨를 뚫고 나오는 쌀알처럼 사회 변화시키는 책 내고 싶어"

김민섭(36)씨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대학 시간강사를 하면서 패스트푸드점 직원으로 일했고, 시간강사를 접고 작가의 길을 가면서는 대리기사 일을 병행했다. 그 밥벌이의 기록들이 곧 글이 되었다. 2015년 출간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하 '지방시')는 최저시급도 보장받지 못해 대학보다 아르바이트하는 햄버거집에 더 소속감을 느끼는 시간강사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했다. 대리운전을 하던 2016년엔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바라본 사회의 모습을 쓴 '대리사회'를 썼다. 2017년엔 태어나고 자란 동네 서울 망원동에 대해 쓴 '아무튼, 망원동'을 냈다. 다양한 책을 낸 것처럼 보이지만 김민섭은 "하나로 묶자면 기록이자 고백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최근 그는 새로운 '기록'과 '고백'을 위해 또 다른 직업을 가졌다. 이번엔 출판사 대표다. 지난해 11월 '정미소'라는 1인 출판사를 등록하고, 이달 초 첫 책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노정석 지음)를 출간했다. 지난 10일 책을 홍보하기 위해 광화문에 온 김씨는 "내가 쓸 수 없는 좋은 글을 쓰는 작가들의 책을 기획하고 만드는 것도 즐거운 일이란 걸 깨닫게 됐다"고 했다.

최근 출판사를 차리고 첫 책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를 낸 김민섭씨. 그는 “글과 삶이 일치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쓰는 글과 닮은 사람들의 책을 계속 내고 싶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출판인으로 변신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2017년 장르소설 작가 김동식의 '회색인간' 기획자로 참여하면서다. "김동식 작가가 원래 인터넷 게시판에 단편소설을 썼는데, 제가 그 소설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마침 출판사 일을 하게 될 기회가 있어 '이 글을 책으로 내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했죠. 그렇게 펴낸 '회색인간'이 12쇄를 찍었고, 이후 '김동식 소설집'을 모두 여덟 권으로 펴냈는데 합쳐서 10만부가 팔렸어요."

'정미소'라는 이름은 작가들의 도정(搗精)을 응원한다는 뜻이다. "제가 '지방시'를 쓰고 대학이라는 세계에서 나오게 된 것처럼,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이 그간 갇혀 있던 세계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쌀도 정미소에서 도정을 거쳐 흰 쌀이 되는 거잖아요." 출판사 로고는 쌀이 볍씨를 뚫고 나오는 모습. 그와 동명(同名)의 디자이너가 재능기부로 그려줬다.

대리기사 활동을 토대로 쓴 책 ‘대리사회’를 낸 2016년의 김민섭씨. 운전석에서 하품하고 있다. /조인원 기자

김민섭이 그리는 '정미소'의 이상(理想)은 "구조적 폭력 안에 있는 개인의 고백을 응원하는 출판사"다. 자신과 비슷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버팀목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는 '지방시' 출간 후 동료 강사들의 공격을 견디다 못해 대학을 그만뒀다. 외벌이였고, 돌 지난 아들이 있었다. 아내에겐 "10년간 논문만 읽고 썼는데, 당신이 괜찮다 하면 앞으로 1년은 글만 써보고 싶다. 1년 동안 2000만원을 벌면 계속해서 글을 쓰겠다"고 했다. 당시 국문학 박사과정 수료생이었던 그는 서른세 살 될 때까지 2000만원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 1만부 팔린 '지방시' 인세와 스토리펀딩 후원금으로 2016년 1년간 2000만원가량을 간신히 벌었다. 그렇게 전업작가가 됐고, 후속작 '대리사회'는 2만부 팔렸다. 출판사를 차린 지금도 간간이 대리운전을 한다. 그는 "돈이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노동하는 게 조금 더 좋은 태도로 글을 쓰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에 낸 책은 숨 막히는 한국 입시제도 안에서 그 제도를 관찰하고 분석한 고3 학생의 기록이다. 10월에는 성소수자에 우울증을 앓고 있어 불명예제대를 당한 군인이 쓴 '내 이름은 군대'라는 책이 나온다. "정의로움이나 상처, 분노를 쉽게 드러내기보다는 담담하고 따뜻하게 자신을 내어 보이면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글들을 출간하고 싶어요."


조선일보 A21면
말모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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