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누가 '진짜 애국자'인가

강호철 스포츠부장
입력 2019.09.16 03:15

의리의 랍신, 사명감의 백지선…
귀화 외국인들의 한국 사랑, 말로만 '애국' 큰소리치는 사람들보다 훨씬 극진해

강호철 스포츠부장

TV를 켤 때 초기 화면에 뜬 덕분에 주한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퀴즈 프로그램을 즐겨 보게 됐다. 어린 남자 형제부터 할아버지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연령·성별로 다양한 외국인들이 국내 출연자와 한국말 상식을 겨루는 프로그램이다. 저걸 어떻게 다 알까 할 정도로 알쏭달쏭한 문제도 거뜬히 풀어내고, 한국말 고수를 자처하는 아나운서 출신 국내 출연자 콧대를 납작하게 만드는 모습에 '진짜 한국인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핏줄에 폐쇄적이었던 국내 스포츠계도 더 이상 '순혈주의'를 고집하지 않는다. 15일 폐막한 남자 농구 월드컵(옛 세계선수권)에선 미국 출신 귀화 선수 라건아(미국명 라틀리프)가 골밑을 책임지면서 한국이 25년 만에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황영조·이봉주가 사라진 마라톤에선 케냐 출신 마라토너 에루페가 오주한이란 이름을 내세워 도쿄올림픽 도전을 준비 중이다. 지난 평창올림픽에선 15명의 외국인 선수가 한국 국가대표 145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일부에선 이들이 돈 때문에 국적을 갈아탔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마녀사냥'은 금물이다. 이들이 펼쳐내는 한국 사랑이 때론 우리의 기대치를 넘어선다. 지난 8월 한국 바이애슬론 사상 첫 세계선수권 금메달(2관왕)을 목에 건 티모페이 랍신은 당시 시상대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고 했다. 러시아 출신인 그는 2017년 초 한국 국적을 얻어 평창올림픽에 출전했다. 다른 특별귀화 외국 선수들 상당수가 올림픽 후 한국을 떠났는데, 랍신은 남아서 태극마크를 지켰다. "어려울 때 나를 받아준 한국이 고마워 은퇴할 때까지 한국 대표로 뛰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한국 아이스하키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백지선 감독은 어렸을 때 캐나다로 이민 갔다. 한국 말이 아직도 서툴다.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 명수비수로 활약한 그가 안정적인 미국 지도자 생활 대신 미래가 불투명한 한국 국가대표 감독직을 받아들인 것은 그의 몸속 한국인의 피가 이끌어 낸 사명감 때문이었다. 2014년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국제대회에서 큰 점수 차로 지지만 않게 해달라는 국내 관계자들의 말에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올림픽만 치르면 끝인가. 이후에도 세계 무대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소년 발굴과 육성, 실업팀 저변 확대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인 플랜을 촘촘하게 세워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을 '귀화 한국인'으로부터 들었을 때, 국내 아이스하키인들의 표정이 어땠을지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애석하게도 한국 아이스하키는 백 감독의 기대와는 달리 시간 역주행을 하고 있다. 올림픽 이후에도 상무를 존속시키겠다는 정부 약속은 공염불이 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기업이 운영하는 하이원은 올림픽 폐막 후 1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선수단에 일방적으로 재계약 불가를 통보하고는 유령처럼 사라져버렸다. "그간 투입한 막대한 비용과 시간, 에너지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라며 실망을 감추지 못하던 백 감독이지만 그래도 "내년 세계선수권과 베이징올림픽 예선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정부의 외면이 만들어 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이 백척간두 남자 아이스하키를 지켜 내려는 충무공 같다.

피부색이나 문화가 달라도 자신이 가슴에 단 태극 마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귀화 한국인들. 정의와 공정이란 가치 대신 이념과 정파를 앞세워 편 가르기를 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내로남불'을 외치면서 새빨간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에게 진짜 애국이 무엇인지 이들이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일보 A31면
말모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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