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집 사러 왔다가 시집도 골랐네… 두 서점의 共生

곽아람 기자
입력 2019.08.23 03:01

'서점 속 서점' 詩전문서점 꾸리는 시인 유희경
'동양서림' 2층에 반년 전 새 둥지… 매출 늘고 노년층까지 고객 확장
"교복 입은 10대가 시 읽는 모습, 문학의 미래에 희망 느껴요"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는 유서 깊은 서점이 있다. 1953년 장욱진(1917~1990) 화백의 부인 이순경씨가 문을 연 '동양서림'. 이씨는 1987년 30여 년 함께 일한 직원 최주보씨에게 서점을 넘겼고, 2004년부터 딸 최소영(50)씨가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창고로 쓰이던 동양서림 2층 공간에 '서점 속 서점'이 둥지를 틀었다. 시인 유희경(39)씨가 주인으로 있는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이다.

동양서림과 위트앤시니컬을 연결하는 나선계단에 선 유희경 시인. 그는 “엄마들이 많이 찾는 동양서림과 협업해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문학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지난 21일 오후 동양서림. 25평(약 82㎡) 규모 매장에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고, 카운터에선 한 중년 여성이 전날 주문했다는 영어 참고서를 계산 중이었다. 서점 입구 매대엔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 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 등 각 분야 책들이 고루 놓여 있었다. 단, 시집은 팔지 않는다. 안쪽 나선계단을 올라가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포크송 울려퍼지는 10평(33㎡) 공간은 시집 1600여 권으로 빼곡했다. 20대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책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희경 시인은 "이 동네로 이사 온 후, 길 건너 동성고 학생들이 종종 와서 한참 책을 보다 간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시집을 읽는 걸 보면 문학의 미래에 희망이 느껴진다"고 했다.

'위트앤시니컬'은 원래 다른 곳에 있었다. 2016년 6월 신촌 기차역 인근 한 카페 귀퉁이에 문을 열었다. "출판사 편집자로 10년 일했는데, 망막박리로 왼쪽 눈 시력을 잃었어요. 글 보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책 만드는 것보단 쓰는 일에 집중해야겠다' 싶었어요." 생계 대비용으로 굳이 '시집 전문 서점'을 연 건 시인의 '낭만'이라기보다는 생활인으로서의 '계산'이었다. "시집은 거의 증쇄를 해요. 소설처럼 3만~4만부 팔리는 시인은 잘 없지만, 증쇄하는 소설가보다는 시인이 더 많아요. 그 숫자가 한데 모이면 서점 유지하는 데는 문제 없겠다 싶었어요." 2년간 그럭저럭 서점을 꾸려왔는데 건물주가 바뀌고, 공간을 얻어 쓰던 카페가 문을 닫는 등 예상치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이사를 고민하는데 동양서림 측에서 리노베이션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셨어요. 여기 와 보고 나선계단 위 공간에 반해 '여길 제게 주십시오' 했지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동양서림 앞에 놓인 위트앤시니컬 입간판에 기대 웃고 있는 시인 유희경. /장련성 기자

그렇게 시작한 동거가 반년을 넘겼다. 두 서점의 '공생(共生)' 시도에 유씨는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라 평했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독자층의 확장이다. "신촌에 있을 땐 아무래도 인근 대학생이 많이 왔다면 혜화동은 조금 더 동네서점 느낌이 나요. 어르신 단골도 생겼고요. 저희 서점 손님들이 동양서림에서 시집 아닌 다른 책을 사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죠." '취향의 공간'인 위트앤시니컬 덕에 동양서림 풍경도 변했다. 두 서점의 공동 매니저를 맡고 있는 조경화씨는 "소설 등 문학책 판매율이 높아졌고 20~30대 손님이 늘어났다"고 했다. 작가 낭독회 등 유희경씨가 기획하는 행사가 한 달에 서너 번꼴로 열리는 것도 '동거' 이후 생긴 변화다. 매출도 올랐다. 유씨는 "예전에 비해 10~20% 정도 좋아졌다. 혜화동 로터리라는 중심가에 신촌에서는 엄두를 못 낼 저렴한 임차료로 자리 잡은 덕"이라고 했다. 수많은 독립서점이 상가 임대차 계약이 끝나는 2년을 겨우 버티다 폐업하는 현실에서, 만 3년을 넘긴 위트앤시니컬의 분투는 고무적이다.

'시인'이라는 본업에도 영향이 있을까. 유씨는 "학기 초엔 문제집 특수가 있어 1층 서점엔 줄 선 학생들로 북적이는데, 시집 서점인 2층에 있는 나는 딴 세계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하여 이런 시를 썼다. "아래층엔 전화벨이 울리고/ 우산 든 사람들의 기척/ 친절과 상냥은 인사를 나누고/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다."(유희경, '감각' 중에서).


조선일보 A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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