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엔 약사 주말엔 춤꾼… "저랑 춤 추실래요?"

부산=구본우 기자
입력 2019.08.15 03:00

[고퇴경]
세계 곳곳서 K팝 춤추는 29세 약사, 구독자 180만 돌파한 스타 유튜버

지난 10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 얼굴을 하얗게 화장한 청년 한 명이 300명 관중 사이에 뛰어들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 소리에 이끌려 관중들이 하나둘씩 끼어들면서 춤판이 커졌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20여 명의 남녀가 케이(K)팝에 맞춰 마치 한 팀인 듯 군무(群舞)를 펼쳤다.

고퇴경은 "K팝에 열광하는 팬들을 보면 내가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CJ ENM
고퇴경(29)씨는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K팝에 맞춰 춤추는 약사다. 약국을 개업한 것은 아니고, 영남대 약학대학 부설 연구소에서 일한다. 그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 '퇴경아 약먹자'는 아이돌 그룹 안무를 따라 하거나, 세계 곳곳의 K팝 팬들과 함께 춤추는 영상으로 구독자 180만명을 돌파했다. 최근엔 '레드벨벳' 'NCT' 등 국내 유명 아이돌 그룹이 직접 출연했다. CJ ENM 다이아 TV는 고씨와 파트너십을 맺고 그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해외 여러 곳 다녀 봤지만, 춤 실력은 한국 사람들을 따라올 수가 없어요. 하하!" 전국의 1인 방송인들이 팬들과 만나는 '다이아 페스티벌 2019' 행사를 맞아 부산을 찾은 그는 멋쩍은 듯 핑크색 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를 만지작거렸다. 영남대 약대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뜻밖에도 "대학 때까지 춤을 배운 적도, 흥미를 가져 본 적도 없었다"고 했다. 2012년 전국약학대학학생협회에서 개최한 동영상 공모전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당시 학부 막내였던 고씨는 선배들에게 등 떠밀려 공모전에 참가했다. 내세울 만한 특기가 없어 한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무작정 흉내 낸 영상을 제출했는데, 덜컥 1등을 해버린 것. 그때의 짜릿함을 잊지 못하고, 졸업 이후 평일엔 약사, 주말엔 '춤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고퇴경(앞줄 맨 오른쪽)과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이 서울의 한 체육관에서 함께 춤추는 모습. /유튜브 캡처
4년 전 방에서 혼자 춤추는 영상을 찍으면서 시작된 유튜버 생활은 점차 활동 반경을 넓혀갔다. 그는 '랜덤 플레이 댄스'라는 참여형 행사를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야외에서 '방탄소년단' '엑소' '블랙핑크' 등의 음악을 틀면 누구나 즉흥적으로 뛰어들어 고씨와 함께 춤추는 방식. 지금까지 미국·독일·이탈리아·인도네시아 등 30곳 넘는 국내외 도시를 춤추며 돌아다녔다. 즉석에서 참여한 사람만 5000명이 넘는다.

고씨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라며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K팝 덕분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아무 말 없이 같은 춤을 추며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K팝은 노래마다 안무가 정해져 있어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가수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인이다. 4월 미국 뉴욕에서 진행한 '랜덤 플레이 댄스' 행사에 그룹 NCT가 깜짝 등장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당시 NCT는 미국 팬 수백 명 앞에서 그룹 슈퍼주니어의 노래 '쏘리 쏘리'에 맞춰 안무를 선보였다. 6월 서울 행사에는 레드벨벳 멤버들이 함께했다. 그룹 트와이스 멤버들은 온라인 방송에서 고씨를 언급하며 "영상을 많이 봤다. 진짜 직업이 약사 맞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세계 각국 사람들과 춤을 추면서 '한국인만큼 춤을 잘 추는 민족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자유로운 춤에 익숙한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칼군무'를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따라 부르는 노랫소리가 스피커보다 큰 미국 사람들의 흥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도 했다.

약사이자 춤꾼으로 사는 것은 "두 가지 모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힘들지 않다"면서도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엔 주저 없이 답했다. "당연히 춤이죠. 너무 재밌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일은 안 일어났으면 좋겠네요(웃음)."



조선일보 A21면
3일의 약속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