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경제침탈·고종의 길 등 아픔 기억하자…서울 다크투어 주목

뉴시스
입력 2019.08.14 07:12
남산 국치의 길 - 노기신사 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윈스턴 처칠)

역사의 아픔을 돌아보며 치유와 교훈을 얻는 서울관광재단 '다크 투어'가 주목받고 있다. 다크 투어에는 어두웠던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다시금 후대가 되새겨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서울에는 나라를 잃은 울분이 가득했다. 오는 15일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울에 남겨진 당시의 흔적들을 찾아 '다크 투어'를 떠나볼 수 있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기억해보기 위해서다.

당시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희미해졌지만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남산 국치의 길

14일 서울관광재단에 따르면 남산은 봄에는 벚꽃을 피우고 가을엔 단풍이 드리우고 밤에는 낭만적인 야경을 선사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강화도조약 이후 서울에 많은 일본인이 들어왔다. 그들은 남산 아래의 충무로 일대에 모여 살면서 영역을 넓혀갔다.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남산 자락에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여러 시설이 들어섰다. '남산 국치의 길'은 그 흔적을 따라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조성됐다.

길은 '한국통감관저 터'에서 시작된다. 1910년 8월22일 데라우치 통감과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곳에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고, 8월29일에 조칙이 시행되면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슬픔을 겪게 된다. 현재 통감관저 터에는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기억의 터'가 조성돼 있다. 기억의 터에 '한국통감관저 터' 비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이 서 있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공을 인정해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통감관저 앞에 설치했다. 기억의 터를 나와 남산 자락을 따라 리라학교와 숭의여대로 향한다. 리라학교 내 남산원에는 노기신사 터가, 숭의여대 교내에는 경성신사 터가 남아있다.

노기 신사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을 지휘한 노기 마레스키를 모시는 신사다.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자가 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기점이 됐다. 이 때문에 남산에 노기 신사를 건설하고 노기 마레스키를 숭배하도록 했다.

경성 신사는 침략 전쟁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일본 내 이세 신궁에서 신체 일부를 가져와 만들어진 신사다. 숭의학교는 신사 참배에 반대해 자진 폐교했다. 해방 후 1953년 경성신사 터 위에 다시 숭의학교가 세워졌다.

남산 케이블카 탑승장 방향으로 남산을 오른다. 탑승장에서 조금 더 위로 가면 한양공원 비석이 나타난다. 한양공원은 1910년 일본인들을 위해 세워진 공원이다. 당시 공원의 입구에 세워져 있던 비석이었다. 후에 조선 신궁이 건립되면서 사라졌다가 케이블카 정류장 근처 숲에서 발견돼 지금의 자리에 비석을 세워졌다.

한양공원 비석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 남산을 향해 걷다보면 서울교육청 과학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일부였다. 조선신궁은 조선총독부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한 후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규모로 조성한 신사다. 조선신궁은 해방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되고 시민들을 위한 남산공원이 조성됐다.

◇경제 침탈의 길

보신각 남쪽 광교를 시작으로 숭례문을 지나 서울역까지 이르는 구간은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을 비롯해 수많은 은행이 밀집했던 금융 지역이었다. 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는 조선은행이 있었고 맞은편에 있는 현 신세계백화점 옆 건물에는 조선저축은행이 있었다.

신한은행 광교 영업부 자리에는 한성은행, 광교약국 자리에는 민족계 은행인 동일은행 등도 있었다. '경성의 월스트리트'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당시 경성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발달한 공간이었다.

그중에는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도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다.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땅을 헐값으로 매입하거나 강제로 가로채 수많은 농지와 임야를 소유했다. 이를 일본인 이주자에게 싸게 팔아넘기는 특혜를 주거나 조선의 소작농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높은 소작료를 징수했다.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현재의 KEB하나은행 명동 사옥에 있었다. 그 앞에 조선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하한 나석주 의사의 동상이 서 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본당으로 알려져 있는 명동성당을 나와 옛 조선은행 건물로 향한다. 일제는 1911년 조선 은행법을 만들고 1912년 르네상스 양식의 3층 건물을 준공해 조선은행을 열었다. 일제는 이곳을 본점으로 해 한국 금융계를 장악하고 중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현재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종의 길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제에 의해 명성 왕후가 시해되자 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데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 2011년까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부지가 한미 정부의 합의에 따라 우리나라 소유로 바뀌면서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경복궁을 빠져나왔던 길이 복원됐다.

힘이 없던 나라의 치욕을 기억하는 고종의 길은 총 길이가 불과 120m로 천천히 걸어도 10분이 되지 않는 짧은 코스다. 고종의 길 끝에 다다르면 아관파천의 목적지인 구 러시아 공사관 건물이 나타난다. 6·25 전쟁 당시 파괴돼 첨탑과 지하 통로만 남아있다.

현재는 안전 문제로 인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어 밖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고종은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다 외국 공관이 밀집해 있던 정동의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격동의 시대로 흘러가는 조선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은 덕수궁이 위치한 정동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내려와 정동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기울어가는 조선의 비운을 간직하고 있는 덕수궁 중명전을 만날 수 있다. 중명전은 서양식 궁궐 건축물로 황실도서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다가 덕수궁에 불이 난 후 고종의 집무실로 사용됐다.

1905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맺으려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넘나들며 3일간 고종과 대신들을 압박했다. 중명전에서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고 5년 후에는 일제식민지가 되는 한일병합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중명전을 나와 정동길을 걸으며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이화학당도 둘러볼 수 있다. 조선 호텔 앞에 있는 환구단도 가보는 것이 좋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환구단에서 하늘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의식을 행했다. 1913년에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파괴됐지만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황궁우는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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